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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세계사

20세기 역사의 시간들


"20세기는 태양 아래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은 '역사의 시간'을 체감하기에 좋은 100년이었다. 그토록 많은 것이 사라지고 생겨난 100년은 없었다."

본문 中



34년 만에 전면 개정이란 타이틀을 달고 출간된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20세기에 일어난 11가지 역사적 사건을 재정리하고 그 의미를 정리해 주는 책이다. 기존의 출간되었던 책을 조금 고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새롭게 썼다. 당시 초판의 시기가 1980년대 후반이었지만 개정판은 21세기를 내다보는 시기기 때문에 20세기를 총정리하는 시간적 차이가 있다.


즉, 초판의 문장은 28살 거친 청년의 시선이었다면 개정판은 환갑을 이미 넘어버린 후다. 새롭게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제목은 그대로 사용했다. 책의 수명이 짧아지는 요즘에도 영원한 필독서로 사랑받는 그의 초판에 이어 이번 책도 많은 분들이 읽기를 바란다. 그만큼 이번 개정판은 완성도 높은 식견이 담겨있다.


시사회에서 그는 자신을 '지식 소매상'으로 비유했다. 지식을 제대로 소비할 수 있도록 소매상 역할을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정보의 바닷속에서 살지만 제대로 된 역사관과 깨어있는 지식인이 부족한 현실에서 얼마나 감사한 분인지 모르겠다.


이전에 읽었던 '역사의 역사' 책을 먼저 읽어서인지, 이번 개정판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역사를 마치 이야기하듯 편하게 서술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는 저자의 분석과 함께 앞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바를 설명해 주는 역사평설이라 너무 좋았다. 


20세기의 여는 역사적 사건의 시작을 그는 '그레퓌스 사건'으로 책문을 열었다. 유시민 작가가 20세기 포문을 연 사건으로 본 의미는 언론이 막강한 권력에 항의하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언론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못지않은 권력을 행사하는 '제4부'가 된다. 프랑스의 민주주의가 허물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신문사와 작가 '에밀 졸라'의 선언, 그리고 반유대주의자의 집단 광란을 이성의 힘으로 이겨낸 시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잠재적 불씨는 정치적, 사회적 사건 속에 항상 존재하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드레퓌스 사건은 유럽 기독교 세계의 천 년 넘는 동안 모든 영역에서 유대인 차별이 있었던 불씨였고 드레퓌스 개인의 비난을 넘어선 유대인의 혐오가 극단으로 치닫게 한다. 오스트리아 특파원 '헤르츨'은 인권 선진국에서 자행되는 반유대주의를 보고 시온주의 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이는 또 다른 비극 팔레스타인 참극의 불씨로 번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또한 드레퓌스 대위의 누명이 국가 기밀을 '적국 독일'에게 넘겨줬다는 것에 프랑스인들이 분괴된 것은 독일에 대한 적개심에 부채질하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이 사건 이후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돈과 권력을 향한 탐욕이 과학혁명의 날개를 달고 벌인 참극이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인류는 무력행사를 절제하는 능력을 기르지 못하고 겨우 20년 뒤에 더 끔찍한 전쟁을 또 벌였다. '위대한 조국'을 들먹이며 민중을 현혹해 싸움터로 내모는 권력자와 정치인은 지금도 있다. "과학 기술은 발전하지만 인간정신은 진보하지 않는다."는 독일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의 말은 진리가 아니어도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



사실 20세기의 주요 사건이라고 하면 제1차, 2차 세계대전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의외로 드레퓌스 사건을 선정했다. 이 사건이 상징하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저자의 의도가 느껴진다. 전쟁을 통한 탐욕의 발로는 호모사피엔스의 '부족본능'이라 할지라도 이성을 지배하는 능력 또한 지구촌을 안전하게 관리하고픈 의지도 내재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20세기는 세계 힘 있는 국가들의 침탈과 전쟁 그로 인한 식민지화, 분열로 인한 사회혁명등으로 극심한 혼란의 시기였다. 현재도 진행 중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중화인민공화국을 탄생시킨 마오쩌둥은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고 말했다. 전쟁이 바로 정치이며 전쟁 자체가 정치성을 띤 특수 수단의 행위라는 뜻이다. 21세기에도 전쟁이 발발하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우리는 과거 역사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발전적으로 흡수해야 한다. 20세기 100년 동안 우리는 피비린내 나는 세계전쟁을 두 번이나 경험했고 자유방임 시장경제의 파산을 지켜봤다. 이상주의 운동으로 인류의 오랜 꿈으로 추앙받던 볼셰비키혁명은 비인적인 전체주의체제임을 알게 되었고 스스로 붕괴되었다. 지금은 정치적으론 공산주의일지언정 경제는 이미 자본주의체제를 받아 드리고 있다. 독일 통일과 소련 해체는 민주주의 시대의 승리로 20세기의 폐막을 알린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진 1990년 이후 자본주의는 '더 나은 대안이 없는' 경제체제가 됐다. 컴퓨터와 정보통신기술의 혁명,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사회의 생산력은 더욱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주기적으로 찾아드는 불황과 '승자독식'으로 흐르는 양극화 현상에서 보듯, 인간은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임의로 통제하지 못한다. 대공황은 사람들이 더 많은 상품의 생산에 열광하고 물질적 부의 축적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던 시기에 세상을 덮쳤다. 인간은 자신이 요술램프에서 불러낸 거인을 다루지 못하는 소년과 같았다. 오늘 우리는 그때와 얼마나 다를까?



하지만 아직까지도 진행 중인 비극의 땅도 여전히 있다는 사실이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건국이라는 명분으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침략은 어떤 시선으로 우리는 바라봐야 할지 현명하게 생각해야 한다. 또한 아직도 인종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미국 백인의 특혜의식도 그렇다. 


저자는 정확한 '백인'의 의미조차 희석된 그들의 인종경계는 객관적인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총기사고가 끊이지 않는 미국을 바라보는 세계인의 심각성을 책임감 있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저자는 그렇다면 미래를 어떻게 전망할까. 신이 되려는 호모사피엔스는 위험하다고 말한다. 유전적 시냅스가 혁신적으로 변화가 오지 않는 한, 책임의식이 통제하지 않는 한, 역사의 시간은 멈추지 않을까 암울한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작은 희망을 갖게 하는 그의 글이 위안이 된다.



'우주의 시간'에서 보면 모든 것이 '헛되고 또 헛된' 일이지만 '역사의 시간'에서는 그렇지 않다. 인간은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고 믿으면서 불합리한 제도와 관념에 도전했다. 때로 성공했고 때로는 실패했지만, 그렇게 부딪치고 싸우면서 짧고 부질없는 인생에 저마다의 의미를 부여했다. 20세기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사는 거야. 불가능은 없어.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아! 그렇지만 나는 의심한다. 영원한 건 없어도 지극히 바꾸기 어려운 것은 있지 않나? 나는 '역사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 사이에 '진화의 시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은 '진화의 시간' 속에서 달라질 수 있다. '역사의 시간'에서는 바꾸기 어렵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_유시민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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