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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애 Jun 19. 2024

로댕 <다나이드, 1889년 경>

여인

로댕 <다나이드, 1889년 경>

대리석속의 여인

 

아름다운 몸매의 여인이 나체로 웅크려 쓰러져있다. 견갑골이며 갈비뼈, 척추라인, 목주름, 귀의 연골까지 그 디테일이 탄성을 자아낸다. 어찌 돌덩이를 이리 섬세하게 깍아냈을까? 참으로 훌륭하다. 피그말리온처럼 소원을 빌면,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살아날 것만 같다. 

 

신화속의 여인

 

이 아름다운 여인은 왜 이리 몸을 뒤틀며 엎드려 있는 것일까? 어디가 아픈 것일까? 왜 웅크리고 있을까? 그것도 나체로? 매끄러운 흰 대리석조각이 마치 여인의 매끄러운 피부 같아 에로틱함을 불러일으킨다. 

 

여성주의 현대미술가 이충열의 <화가들은 왜 비너스를 눕혔을까?>에서는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예술품속에 ‘대상’으로 그려진 여성들의 누드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금처럼 사진도 티브이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대에, 남성들의 관음증과 성적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비너스들이 누워있다는 것이다. 

 

고대에는 에로티시즘과 성욕을 신의 선물처럼 여겼다고 한다. 약 2.000년전 번성했던 폼페이 벽화에서 보면 여성을 수동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여성상위체위도 많도, 여성에게 애무하는 남성의 모습, 이성애 중심의 일대일 관계에서 벗어난 그림들도 있다.

 

삼위일체설, 원죄설, 구원설 등 기독교의 거의 모든 교리를 만든 아우구스티누스가 금욕을 주장하고, 성욕을 악으로 규정하면서 성욕에 대한 인식이 변화했다. 자녀를 낳기 위한 성관계를 제외하고는 죄악으로 여기게 되었다.

나도 폼페이에서 이런 벽화들을 보았었다. 결혼 전이어서 낯뜨거워 하면서도 친구와 함께 호기심 가득하게 보았던 기억이다. 우리는 그곳이 성매매장소일 것이라 추측했었다. 그 때 당시 기독교인이었던, 우리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아래 있었던 것이다.

 

금욕주의적 기독교 세계관에서 남성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비너스’, 즉 ‘미의 여신’으로 그린 것이다. 인간을 만든 신의 능력을 찬양한다는 명분으로 실제로는 남성의 욕망을 채우는 포르노그래피의 기능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정적인 모습의 누드도 ‘비너스 여신’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예술이 되는 것이다. 벗은 여성의 인격을 신격화하고 현실의 육체에 고상한 신화의 옷을 입혀 천상의 육체로 승화시킨 것이다.

 

반면, 마네의 <올랭피아>는 시민들의 분노를 사서 훼손하려는 통에 높은 곳에 걸었다고 한다. 실제 술집에서 일하는 어린여성을 모델로 그려, 당시 창부의 흔한 기명이었던 ‘올랭피아’를 대놓고 제목으로 지었다. 더구나 그림 속 여인의 시선은 당당히 관객을 향한다. 이처럼 누드의 인격을 천상에서 지상으로 떨어뜨려 격하시켰기 때문에 ‘외설’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예술’과 ‘외설’이 다르다는 신화를 믿는다. 하지만 그 신화는 남성과 권력층이 만들어낸 기준에 마지 않는다. 여성이 성적대상이 되어 남성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으면 예술, 여성의 능동성이 드러나 남성의 감상이 방해되면 외설인 것이다. 

 

이 아름다운 여인의 풀어헤친 머리와 나체의 골반라인을 보며 클림트의 ‘다나에’가 떠올랐다.

비너스와 함께 인기를 끈 신화 속 주인공이 ‘다나에’이기 때문이다. 언뜻 제목도 비슷해서 동일인으로 착각할 뻔했다. 신화를 찾아보고 나서야 다른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다나이드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다나오스의 딸들’이란 뜻이다. 그리스 아르고스 왕이었었던 다나오스는 사위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신탁을 듣는다. 이에 50명의 딸들에게 첫날밤에 남편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49명의 딸(다나이드)은 남편을 살해하고 그 죄로 밑바닥이 빠진 항아리에 끊임없이 물을 채워야하는 영겁의 형벌을 받는다.

 

현실속의 여인

 

우리말로 ‘밑빠진 독에 물 붓기’다. 아이를 키우며 이 기분을 느낀다. 똑같은 말을 백만번은 한 것 같은데 아이의 행동은 매번 똑같다. 내가 아이였을 때 언제나 화를 내는 부모님을 보며 ‘좋은 말로 하면 될 껄 왜 화를 낼까?’궁금했다. 내가 부모가 된 지금 ‘왜 좋은 말로 하면 알아듣질 못하는지?’가 궁금하다.

 

하루 하루는 밑빠진 독에 물붓는 것 같은 육아도 되돌아보면, 그래도 똥오줌은 가리고, 그래도 말은 하고(할 줄은 알고), 그래도 학교는 가고, 진학도 한다. 그래서 백만번 하는 말을 또 다시 반복하며 짜증이 나도, 성큼 커준 것에 감사하고, 공부는 안하지만 건강하게 자라준 것에 감사하고, 나와 함께 있어줌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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