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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케니 Sep 28. 2022

첫 번째 외출 썰

나는 희남이로소이다 - 04


14년 동안 한 직장에서만 일을 해본 적 있는가? 만약 있다면 당신은 내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특히나 나 같은 고양이에게 14년은 굉장히 긴 시간이고, 그동안 권태로움에 빠진 적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권태로움이 극에 달할 때 가장 필요한 건 바로 온몸의 교감 신경을 활성화시킬 자극이다. 눈 감고도 돌아다닐 수 있는 이 지루한 병원 일상에서 자극을 찾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바로 외출이다. (교감 신경 : 신체가 위급한 상황일 때 이에 대처하는 기능을 한다.) 


[사진 03-1. 권태로움에 빠진 희남]




몇 년 전 어느 봄날, 아프니까 동물병원의 대로변 출입구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뚱이야, 어서 들어가자니까!”  


덩치 큰 시츄 한 마리가 보호자와 씨름 중이었다. 보호자는 이미 병원 출입문을 열고 몸이 반쯤 들어온 상태였으나 뚱이라 불리는 시츄는 완강하게 들어가길 거부하고 있었다. 나이 든 시츄답게 온 몸으로 저항하며 똥고집을 부렸다. 출입문을 한 손으로 연 채 반대쪽 손으로 리드 줄을 수 차례 당겨도 육중한 몸으로 맞서는 뚱이를 가녀린 보호자가 이길 수는 없어 보였다. 결국 보호자는 문을 힘차게 젖혀 열어둔 뒤 뚱이를 안고 병원 내부로 들어오며 볼멘소리를 하였다. 


“어유, 얘는 병원 앞에만 오면 왜 이렇게 안 들어가려고 애를 쓰는지…” 


병원에 들어와서도 계속 출입문을 향해 나가려는 뚱이를 보호자는 리드 줄로 제어하며 접수를 하였고 이때까지는 그저 평소와 다름없는 봄날이었다.  


‘고놈 참 말 안 듣게 생겼네.’ 


몸을 일으켜 뚱이를 내려다본 뒤 다시 방석에 턱을 괴고 엎드려 한숨을 작게 내 쉬었다. 그런데 그때 왠지 모를 상쾌함이 코안 가득 느껴졌다. 


‘뭐지, 이 설레는 향기는? 어디서 풍기는 거지?’ 


후각에 온 신경을 집중하여 코를 벌름거려보니 확실히 병원 냄새가 달라져 있었다. 수많은 강아지, 고양이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섞인 병원 특유의 냄새를 밀어내고 어디선가 들어온 가슴 설레는 내음이 병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병원 집사들과 손님들, 그리고 우매한 개들은 이러한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어 보였고, 접수대에서 내려와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이내 꽃내음이 어디서 들어온 건지 알 수 있었다. 뚱이 보호자가 활짝 열어둔 출입문은 여전히 활짝 열린 채 나를 유혹하듯 거리의 향기를 병원 안으로 불어넣고 있었다. 


순간 수많은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그 문을 나서기로 결심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을 향해 걸어가는 나의 설레는 발걸음을 막는 것은 인간의 무릎 높이에 지나지 않는 이중 안전문 뿐이었고, 이는 고양이인 나에게 그저 아무 거리낌 없이 넘어 다니는 문지방에 지나지 않았다. 가벼운 도약과 조용한 착지로 안전문을 뛰어넘은 뒤 나는 주저 없이 병원 출입문을 나섰다. 




병원 내부와 길거리를 구분 짓던 유리 한 장의 위력이 이렇게 대단한 것이었던가. 거리의 햇볕과 바람은 병원 내에서 느끼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거리의 햇볕은 병원 내에서 즐기던 것보다 내 몸 더 깊은 곳까지 들어와 권태로움에 식어버린 내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주었고, 그와 함께 불어오는 잔잔한 봄바람은 나의 몸을 띄워 내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지금부터 벌어질 나의 이 위대한 모험에 과연 어떤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을지 너무나 설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모험에 앞서 우선 넘어야 할 관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동차들이 빠르게 지나는 넓은 길을 건너는 것. 넓은 길 건너편에 큰 나무들이 있었고, 그 너머에서 온 몸의 털을 곤두세울 짜릿한 냄새가 불어오고 있었다. 온갖 종류의 처음 맡아보는 냄새들이 온몸의 세포를 자극하였고, 당장이라도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을 피해 가며 전속력으로 길을 건너고 싶었다. 하지만 병원에서 오래 근무한 나는 이러한 어리석은 행동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불러일으키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내 장기인 참을성을 발휘하였다. 섣부른 행동으로 나의 첫 자유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몇몇 인간들이 길 건너까지 이어진 하얀 줄무늬 앞에 옹기종기 서 있었고,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가벼운 눈인사를 하고 앉았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는 아프니까 동물병원의 대기실에서 오랜 기간 보고 배웠기 때문이다. 바로 거리의 규칙을 말이다. 인간은 하얀 줄무늬 앞에 모였다 떼를 지어 이동하는 습성이 있다. 그럴 때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자동차들이 멈춰 섰고, 이러한 패턴은 낮이고 밤이고 반복되었다. 아마 노랭이나 얼룩이는 나와 같은 광경을 보았어도 이 패턴을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나의 심장 박동은 더욱 빠르고 강렬하게 뛰기 시작했고 주변 인간들의 수군거림도 더 이상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나의 시선은 길 건너 수풀에서의 부자연스러운 이파리의 움직임에만 집중되어 있었고 어느새 나는 그곳을 향해 몸을 천천히 일으키고 있었다. 이제 곧 펼쳐질 미지의 세계로의 모험이 시작되는 순간,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덥석 들어 올렸다.  


“어머, 희남아! 네가 왜 여기 있어?”  


아, 이런 제길. 이 사람은 병원 손님이다. 보리라는 강아지의 보호자인 이 사람은 매주 아프니까 동물 병원에 보리의 목욕을 맡긴다. 그래서 단번에 내가 아프니까 동물병원의 직원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분명 뚱이가 올 때만 해도 병원에서 보리의 목욕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목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나 보다.


‘놔!’ 


나의 신경질적인 말을 그저 야옹이라 흘려들은 보리 보호자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나를 안고서는 병원으로 들어섰다. 이렇게 나의 첫 번째 탈출, 아니 외출은 싱겁게 막을 내렸다. 한 동안 나의 외출은 집사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한 집사가 말했다. 


“얘가 겁도 없이 어딜 나가, 넌 길냥이 되면 굶어 죽을걸?”


어이가 없었다. 내가 얼마나 훌륭히 길거리 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날 이후로 더욱 철저해진 문단속으로 더 이상 밖으로 나갈 순 없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날을 제외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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