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철도원 삼대> p374~p402, 12
“고개를 쳐들고 시간표를 보는 시늉을 하면서도 그는 뒤통수가 근질거렸고 가슴은 몹시 뛰기 시작했다. 그 사내의 얼굴을 본 순간 야마시타 최달영은 불침을 맞은 것처럼 화들짝 놀란 것이다. 대합실의 사람들이 술렁대더니 개찰이 시작되었다. 그가 돌아보니 승객들이 줄지어 개찰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야마시타는 줄에 끼어들지 않고 국방색 외투가 인파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멀찍이 떨어져서 조장을 관찰하던 보조원이 뛰어와서 다급하게 말했다. /미행하지 않습니까?/”(p377)
*****방우창을 미행하던 최달영은 자신의 친구 일철의 동생인 이철이 방우창을 만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이철임을 알게 된 최달영은 놀란다. 그리고 너무나 잘 아는 이임으로 더 이상 쫒지 않는다. 그가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은 자신의 친구 일철이 임을 알고 있으므로. 냄새나는 자신을 편들어준 일철이 정작 졸업식땐 아는척하지 않고 간 것을 기억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보통학교 밖에 안 나왔지만 경찰국의 고등형사인 자신의 위세를 친구에게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까? 담배를 한 모금 빨고 길게 내뿜는 그의 내면은 복잡하게 피어오르고 있다.
“새벽의 고문은 매우 끔찍하게 계속되었다. 방우창은 세 번이나 기절했고, 그때마다 대기하던 의사가 들어와 강심제 주사를 놓았다. 날이 밝아올 무렵에 방은 꺾였고 권 모가 은신한 익선정 담배가게 아지트를 불었다. 경무국에서 직접 나와 있던 경부보는 비상 전화를 통하여 형사대를 익선정에 급파했고 그를 검거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모리의 지휘를 받아 방우창을 직접 고문한 야마시타 등 조선인 형사들은 영등포 관할의 각 공장으로 나가 노동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 방우창은 최후의 기력을 잃었는지 사망하고 말았다.”(pp380~381)
*****이 책 pp336~3337쪽에는 이재유를 잡아들인 일제가 가한 고문의 방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물론 고문 기술자들은 거의 모두 조선인이다. 그럼에도 이재유는 두 번의 고초에도 결국 탈옥을 성공했었다. 하지만 죽을 고비를 몇 번씩 넘겼던 방우창은 최달영의 끈질긴 추적에 잡혀 결국 감옥에서 죽음을 당한다. 자신의 핏빛 신념은 감옥 바닥을 이슬처럼 적셨다. 고통 속에서 덧없이 죽을 수도 있음을 진즉에 알았던 그의 신념은 엄혹한 시대의 빛이 된다.
“야마시타 최달영이 다른 자리에서 지켜보던 보조원을 돌아보자 그가 다가와서 이철의 두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일철은 아우를 연행하는 야마시타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잘 처리해 주게. 그 은혜는 내 잊지 않으마./ 야마시타 최달영은 싱긋 웃으며 이일철에게 말했다. /저지른 일이 있으니 징역 좀 살아야 할 거야, 한데 왜 너는 창씨개명하지 않나? 이제 시책이 내려왔지만 전국민화될 텐데 말이야./ 이일철은 그 말이 폐부에 깊숙이 와닿았다고 한다. 아, 일본식 이름이 필요하겠구나. 온전히 철도국 밥을 먹고살려면 총독부에서 시키는 일에 고분고분 응해야 할 것이다.(p392)
*****스승의 시골집에 피신해 있던 이철을 형인 일철은 밤새워 설득을 했다. 동생 이철이 세운 뜻을 일철은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지금 닥친 위기를 모면한 뒤 다음 뜻을 기약하기를 부탁했다. 하지만 그날 밤 형제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이철은 형을 불렀다. 최달영에게 동생을 자수시킨 일철은 동생을 부탁한다. 최달영과의 의외의 만남에서 동생을 생각하게 했던 것은 이날을 위해서일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내밀 수 없는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었다. 그리고 창씨개명을 질문받는다. 그가 살아가는 방법이 동생과 다르다는 것은 표현할 수 없는 슬픔으로 다가왔다.
“나룻배에 오르기 전에 한여옥은 이일철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언제 식구들을 다시 만나 뵐지 모르겠군요. 조선이 독립하는 그날이 오면 제가 영등포 집으로 찾아가게 되겠지요. 신금이 형님에게도 인사 전해주십시오./ 이일철도 허리 숙여 인사를 받고는 말했다. /장산이 엄마를 우리 모두 기다릴 거요.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오!/”(p402)
*****이철이 감옥생활을 할 동안 여옥은 막금의 집에서 아이를 낳는다. 하지만 백일을 넘긴 아이는 홍역에 걸려 죽고 만다. 늘 힘겹고 어려운 시절에는 삶과 죽음이 아무렇게나 눈 앞에 놓인다. 아이를 잃은 한여옥은 옥중에 있는 이철과 의논 후 자신의 본래 삶으로 돌아가려고 결심한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평범한 일이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음을 안 것이다. 기관수인 일철의 도움으로 예전에 활동하던 만주로 가게 된다. 그리고 약속한다. 독립이 되면 돌아오게 될 것을. 삶과 죽음처럼 만남과 이별이 척박한 땅에서 아파할 겨를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뒤에는 그리움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