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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Oct 10. 2024

나, 버리면 안 된다. 나, 책임져야 돼 (14화)

우리는 서로 경찰을 불렀다.

경찰까지 부를 정도로 우리의 부부싸움은 커져갔다.


경찰 불러라! 불러!


치열하게 싸웠다. 전쟁이었다. 생사를 가름할 수 없는, 누구의 말이 맞는지, 자존심의 대결이었다.


"엄마, 아빠, 이혼하세요."

큰아들의 말이었다.

"나이가 들면 서로 편해진다고 하던데."

작은아들의 말이었다.


자존심 싸움이다.

누가 한 사람이 져야 한다.


엄마가 이겼다. 당신이 이겼다. 엄마 말이 맞다. 당신 말이 맞다.


그래도 나는 성이 차지 않았다. 


어느 시니어 직원이 한 말이 기억에 남았다.

"여기 있는 게 아깝다.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연예인 같다."

남편만 모르고 있는 사실을, 현실을 남들이 이따금씩 말해주고 있었다. 그때쯤 나도 그런 생각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었다. 나는 여기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애를 먹고 있구나.


퇴직하고 나서 어느 날 퇴근하고 온 남편과 저녁식사를 하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시니어 직원이 두 명 온다고 했다. 4시간 정도 근무한다. 오전에 1명, 오후에 1명. 시니어 직원이 보조 선생님으로 오기 시작하는 첫 해에는 두 명이 왔지만, 찾는 센터가 많아지면서 시니어 직원이 한 명만 오게 되었다. 그런데 올 해에는 두 명이 오게 되어서 일손이 덜 달린다고 했다. 정규 직원만으로는 일손이 부족했다. 직원들에게는 휴무와 연차를 줘야 되고 어르신들은 손길이 많이 갔다. 어르신들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상생활이 잘 안 되기 때문에 도움이 많이 필요했다. 또 병원에 모시고 갈 어르신에 직원이 두 명 필요할 때도 있었다. 몸을 가누기가 아주 어려운 어르신에게는 직원이 두 명 필요할 때가 있다. 


올해 오후에 오는 시니어 직원이 남편에게

"대표님, 원장님은 언제 나와요? 원장님, 함 뵙고 싶어요."

그 시니어 직원의 며느리가 나를 많이 칭찬했다고 한다. 아주 똑똑한 사람이다. 그 똑똑한 사람이 원장님으로 있는 센터에서 시니어로 일하게 되어 무척 기대가 되었다고 한다. 그 며느리는 학교에서 강사로 일할 때 나와 한 학교에서 오랫동안 일했었다고 한다. 그분이 누구인지는 짐작이 안 갔다. 그런데 나는 학교 강사로 좀 레전드였었다. ^^  두 학교에서 10년씩 일했었고, 매 년 학생수가 엄청 많았다. 학교방문하는 날에는 담임선생님들 보러 오는 학부모보다 강사인 나를 만나러 오시는 분이 더 많을 때도 있었다. 나를 만나러 오는 학부모들을 보고 의아해하시는 각 교실의 담임선생님들이 내가 가르치는 교실 주변을 서성거릴 때도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이제 알았어요? 내가 레전드였다는 것을. 호호."

"응."

"좀 놀랐어. 당신을 찾아서."

담담하게 대답하는 남편의 얼굴이 꽤 진지해 보였다. 좀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센터를 나오고 나서 주변 사람들한테서 들은 말들이 또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예술가 같다. 디자이너 같다. 멋지다. 뉴요커 같다. 예술가 분위기가 많이 난다. 올 추석 전에 들었던 말들이다.


그러고 보니 국어논술강사로 일할 때도 미술 선생님이나 음악 선생님으로 오해를 받을 때도 있었다. 긴 스카프를 늘어뜨리고, 발표회나 독주회 같은 곳에서 입는 스타일리시한 원피스를 잘 차려입고 다녔다. 비싼 옷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격식에 맞게 잘 차려입고 다니려고 노력을 했었다. 앞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게 중요했었고, 학교에 들락거릴 때 학교 입구에서 만나는 직원들부터 교무실에서 만나는 교원들, 행정실에서 만나는 직원들, 복도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 누구에게도 격식을 갖춘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었다. 정장 차림을 주로 하고 다녔다. 



4년의 폭우와 비, 바람에도 따뜻한 햇볕이 있어서일까? 날씨처럼. 우리 네 명은 다시 모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화목했었던 그 예전의 우리들의 삶처럼.


올 추석은 우리 네 명이 따뜻하게 보냈다. 드디어 울 가족 네 명이 마음 편하게 보냈다. 도란도란 오붓하게 정답게 보냈다. 서로를 보는 시선이 따뜻했다. 

명절 식사를 하고, 뷰가 좋은 커피숍에서 그날 우리 애들은 나에게 이런 말들을 했다.

"이제 살아 있는 사람 같다. 반짝반짝 빛이 난다."

큰아들이 한 말이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


"엄마, 멋지다. 목표가 있는 인생을 산다는 게."

작은아들이 한 말이다.

"현관에 들어설 때 엄마가 대학생처럼 보였어."


추석이 지나고 어느 날 남편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요즘 당신은 여유 있어 보이고 편안해 보여. 반짝반짝해 보인다. 얼굴에 빛이 난다."

"전에는 학생들 가르친다고 거기에 시간을 다 빼앗겨잖아. 그 시간을 배우는 데 써서 그런가. 잘하는 게 많아지는 것 같아. 건강해지고."


내 헤어스타일을 해주고 있는 24세 헤어디자이너 님은 

"현정 님은 세상일에 관심이 많아요."

나와 살아가는 이야기를 자주 하다 보니 나를 알게 되는 것 같았다.


스팀우유가 갑자기 먹고 싶어졌다. 우유를 끓여서 먹으면 아주 맛있다. 아파트 안의 편의점에 우유를 사러 갔다. 추석 이후 몇 번 갔었기 때문에 오랜만은 아니었다. 여사장님과 가끔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잠깐 할 때가 종종 있다. 계산대에 우유를 놓으니 오늘도 어디 갔다 오는 길이냐고 묻는다. 화이트트위드스커트를 입고 블랙크링클시스루 블라우스에 화이트 셔츠를 입은 모습이 외출복으로 보였나 보다. 그냥 아, 네.라고 대답했다. 

"영화배우처럼 사는 것 같다."

기분 좋은 말이다. 멋있게 산다는 말이 아니겠느냐. 

"맨날 기분이 좋아 보여."

(실은 마음이 안 좋을 때도 있었지만 인상을 찡그리지 않고 다녀서 좋게 보였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남편이 올해 이른 초봄, 어느 날 주차장이었나? 산책 중에 도로였었나? 아니면 우리 집 거실에서 지나가듯이 이야기했었나? 그날이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한 말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나, 버리면 안 된다. 나, 책임져야 돼."


퇴직하고 내 삶이, 내 인생이 각박하게 무너질 줄 알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너무 잘 살는 모습을 보여주니, 남편이 위기를 느꼈나 보다. 이혼당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나 보다. 나는 그때 살짝, 짜릿한 승리감을 맛보기도 했었다. 

<모네의 해돋이, 인상주의의 시작인 그림>


그런데 시간이 좀 흘러서 가을로 성큼 들어왔을 때, 나는 추수하는 농부의 마음처럼 온유하고 겸손해져 있었다. 책임진다는 말은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마음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은 

"당신이 좋으면 나도 좋아. 당신이 좋은 게 제일 중요해."

"내가 돈 벌고, 당신은 지금처럼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잘 지내면 돼."

"나, 정말 열심히 하고 있어. 당신 하나는 내가 공주님으로 잘 모실 수 있어."


올여름은 무척 덥지 않았는가. 남편은 원래 까무잡잡한데, 꽤 많이 탔었다. 남편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일일이 설명을 다하지는 않았지만, 30여 년을 함께 살아온 나는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런 말까지 듣게 되었다. 그동안의 내 고생을 좀 알아주는 것 같아서, 여러 마음들이 교차되었다. 


내가 행복해질수록 그도 행복해졌다. 내가 기쁠수록 그도 기쁘졌다. 내가 즐거울수록 그도 즐거워졌다. 내가 아플수록 그도 아팠다. 내가 슬플수록 그도 슬펐다. 내가 외로워질수록 그도 외로워졌다. 그래서 그런가 보다.


돌고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왔다. 서로 아끼면서 살았던 시절로, 잘 지내요, 화이팅! 오늘 잘 지냈어요 ^^ 맛있는 먹어요. 부부, 서로 아끼면서 서로 책임져 주는, 가끔씩 눈치도 보는, 가끔씩 서로 봐주는 그런 부부.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거실에서 우리 네 명이 각자 편안한 포즈로 기념사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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