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백 Sep 23. 2022

잡초의 미학

소소일상


해가 질 무렵이면 노곤해진 햇살을 따라 종종 마당을 거닌다. 조용하던 잔디밭에 나타난 그림자를 보고 놀란 방아깨비들이 폴짝폴짝 제 살길을 찾아 흩어진다. 게으른 주인장을 닮아 마당은 적당히 어수선하다. 며칠째 텃밭에 널브러진 호미와 빗자루, 울타리 장미 아래 아무렇게나 돋아난 풀과 목을 길쭉하게 빼고 있는 수돗가 호스가 묘하게 평화롭다.


집을 지을 당시 토목공사를 하지 않고, 큰 조경석을 쌓아 축대를 만들었다. 돌 틈 사이사이 흙을 채운 후, 이사를 오자마자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영산홍과 맥문동을 심었다. 주방 창 맞은 편엔 납작한 분홍 카네이션을 심어 내다보는 재미를 더했다. 천천히 폈다 졌다 지금껏 봄 느낌을 선물해주는 녀석이 고맙다.


​발걸음을 옮겨 서쪽 방향 조경석으로 향했다. 눈에 띄는 꽃봉오리가 보인다. 며칠 전까지는 레이더망에 들어오지 않던 잡초였는데, 어느새 키가 훌쩍 자라 꽃을 피우려는 게 아닌가. 실은 그 자리는 맥문동이 양쪽으로 심겨 있었다. 하지만 거긴 흙을 많이 채울 수 없는 자리였기에 생명이 자라기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 결국 맥문동 하나가 죽고, 같은 자리에 이름 모를 잡초가 돋았다. 굵고 큰 줄기를 저만치 올리려고 민들레처럼 바닥에 딱 붙어 숨죽이고 있었나 보다.


​잎은 제법 크고, 끝은 뾰족해서 힘이 있다. 잡초라고 하기엔 풍채가 좋으신 몸이다. 흙 유실을 막을라치면 뽑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 사실 방치했던 존재다. 올해 처음 심은 맥문동은 내년에나 보라빛 꽃을 볼 수 있을까. 짙어지는 초록을 보며 만족해야하는 맥문동과 달리 이 잡초는 어쩐 일로 잔뜩 힘주어 자신을 뽐내고 있단 말인가. 거친 생명이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그때문이었는지 집에 들어와서도 자꾸 아른거린다.


​선택받지 못한 삶이란 있을까. 왜, 무엇 때문에, 무슨 기준으로, 어떤 목적으로. 집 마당만 봐도 그렇다. 당연한 이름이 붙어 있고, 화분에 곱게 담겨 흙으로 옮겨졌으며, 예쁜 꽃을 피울 때 온갖 사랑스러운 눈빛과 찬사를 받는다. 누구는 꽃 대접을 받고, 누구는 잡초 대접을 받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바위틈의 맥문동이나 이름 모를 잡초나 모두 흙을 꽉 움켜쥐고 버티어주는 고마운 존재들인데 말이다. 누가 그더러 잡초라 불렀는가!


​현실 세계에 많은 것들을 꽃과 잡초처럼 구분 짓고 평가해 왔던 좁은 시야가 들킨 것 같아 뜨끔하다. 겉으로는 아닌 듯 굴었어도 세상 곳곳을 향한 평가적인 시선을 감출 수 없다. 이득이 되는지 아닌지, 좋은지 나쁜지, 관심사인지 아닌지. 단칼에 꽃이 되고, 단칼에 잡초가 된다. 그건 어떤 일, 어떤 물건, 또 어떤 사람일 수도 있다.


​내가 좋아서 키우면 잡초도 꽃이 된다는 사실. 그것이 중요하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하찮은 나의 어떤 것'을 스스로 아끼고 좋아해줄 때 비로소 그것은 잡초로 크지 않고, 꽃으로 변한다. 어디 가서 대접을 못 받더라도 적어도 내 마음의 정원에서는, 나의 세계에서만큼은 온전하게 꽃피우도록 대우 받는다. 나를 아낀다는 건 이런 의미도 담겨 있는 것일 테다.


​당당히 꽃대를 올린 이름 모를 풀이 내 안에 피어있을 잡초가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 들여다보도록 가르침을 준다. 마음의 정원을 잘 돌보라고 말이다. 비료를 주고, 관심을 기울이는 건 필수. 가을 햇살이 도망가기 전에 마당 식구들에게 물을 주러 가야겠다. 얼마만큼 꽃잎이 벌어졌는지 궁금해진다.


잡초가 기대주가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디까지 익었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