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원의 자리

<은유의 잔향> Episode 4

by 은유의 잔향

부제: 틈은 어디에서 오는가


둘은 하나의 원을 고르기 위해

끝없이 방향을 맞추며

손끝의 미세한 떨림까지도

의미처럼 받아들였다.


금속의 얇은 곡선에

빛이 어떻게 스며드는지,

손가락의 온도가

어떤 결을 만들어내는지,

마치 그 작은 원이

둘의 시간을 감싸 안을 수 있을 것처럼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솎아내고 골라내던 시간보다

정작 원과 함께한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짧았다.


물에 닿으면 흐려질까,

일할 때 걸리적거릴까,

손이 붓는 날엔 조금 더 불편할까.

그래서,

특별한 날도 아니게 되었고


그 작은 원은

삶의 결 속으로

조용히 묻혀 들어갔다.


이유들은 모두 사소했고,

사소한 만큼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다.


손가락이 기억하던 원의 감각은

서서히 희미해졌고,

그 빈자리는

어느새 자연스러운 형태가 되어버렸다.


그 상실의 자리엔

금속의 차가움 대신

설명하기 어려운 여백이 남아 있었다.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조금씩 기억과 약속에서 밀려난 자리


틈은 언제나,

사라짐이 아니라 익숙해짐의 얼굴로 시작되었다.


오늘의 잔향 — Hania Rani – “F Major”

(이 글을 쓸 때 흐르던 음악)


상실은 금속이 사라진 자리에서가 아니라,

기억이 조금씩 밀려난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흔들린 것은 반지가 아니라,

반지가 감싸고 있던 형태였다.


※ 이 글에 언급된 음악의 모든 권리는 해당 아티스트에게 있으며,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습니다.


ⓒ 이혜미, 『은유의 잔향』 중에서. 인용 시 출처 표기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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