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람찬 백수생활
“지금 좀 해 줄래?”, “여기로 지금 나와.”
백수로 지내면 자주 받을 수 있는 연락들이다.
나는 내가 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사람만 알게 하고 연락이나 만남이 자주 있지 않는 사람에게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아직도 계속 직장을 다닌다고 생각하는 주변인들에게는 듣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직장을 다녀도 퇴근 후나 주말 같은 날에는 주변인들로부터 갑작스러운 부탁을 받을 수 있다. 그런 경우 평일에는 자신의 일을 하면서 남는 시간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등 어렵지 않다면 부탁을 들어줄 수 있다. 하지만 직장이 없이 쉬고 있는 사람에게는 좀 더 시도 때도 없는 부탁이 있을 수 있다. 따로 다니는 직장이 없다고 해서 언제나 부를 수 있는 사람이거나 언제든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도와 달라고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물론 직장을 다니면 개인적인 볼일을 보기가 힘들다는 것은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다.
쉬어보니 평일에 은행이나 병원, 관공서 등을 갈 일이 있을 때에 너무 편했다. 평일에만 열려있는 그런 곳은 또 다른 직장에서 같은 시간에 근무를 하는 직장인들로서는 이용하기가 어렵다. 부득이하게 시간을 내야만 간신히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경우 진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엄마의 도움을 받기도 했는데 지금은 내가 오히려 이런 일은 도와 드릴 때도 있다. 이런 걸 보면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고 해도 도움을 받기만 해서 미안했던 것도 조금은 해소가 된다. 도움 받았던 것을 생각지도 못했을 때 갚을 기회를 온다는 것도 백수로 살아보고 느낀 질량 보존의 법칙의 일부이다.
직장을 다닐 때는 연차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 사실 처음 직장을 다닐 때는 그런 것을 쓸 수 있다는 것조차 말해 주지 않아서 모르고 있었다. 아마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다고 해도 맡았던 일의 특성상 하루라도 쉬고 오면 처리해야 할 일이 2배로 많아져서 지레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눈치가 보인다는 말보다는 일이 많아져서 포기했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아주 예전에 같이 일하던 분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당시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고 일을 하시는 워킹맘이셨다.
“우리 아들은 은행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 어린이집에서 배워서 은행이라는 것이 있다는 건 아는데 내가 평일에 데려갈 시간이 있어야 같이 은행에 가지. 여름휴가 때나 갈 수 있을까?”라고 하시며 아들과 은행가는 것까지 계획을 세우시는 것을 보았다. 조부모님도 없이 맞벌이로 그날 그날 조금 일찍 퇴근하는 사람이 아이를 하원시키며 직장생활을 하시는 분이었다. 그래서 퇴근 시간이 되면 나까지 맘 졸이게 하기도 했다. 아이가 은행도 가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지만 사정을 듣고 나니 충분히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직장인의 경우 점심시간을 이용해 은행 등의 업무를 잠깐 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도 식사를 마치고 짧은 시간에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그런 볼일이 주기적으로 있는 일은 아니지만 병원이나 은행 등을 아예 찾지 않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을 쉴 때 원하는 시간에 부담 없이 내 볼일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편했다. 하지만 평일에 이렇게 시간을 쓸 수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볼일까지 나눠서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오늘은 ‘무엇을 해야지’ 하고 생각한 것이 있을 것이다. 하루 종일 시간이 있는데 급한 건 없다. 꼭 책을 보고 직업 관련 공부를 하는 등의 일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한다. 종일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거나 뒹굴뒹굴 거리며 휴대전화와 TV만 보며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친구를 만나 밖에서 하루를 보내고 들어올 수도 있다. 그 하루가 자신에게 에너지 충전이 되고 기분전환이 되는 행동이라면 하루정도는 그렇게 지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낸 하루라고 해서 나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늘에 별이나 비행기가 올려다보면 한 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빠르게 움직이는 중이라고 하지 않던가!
또한 쉬다 보면 계획하지 않은 다른 일로 빠지도록 만드는 유혹도 많다.
평소에는 거슬리지 않던 것이 중요한 일을 하려고 하면 빨리 처리하고 싶어 진다. 출근해서 일을 했다면 그때 하지 않아도 되었을 일 특히 집안일들이 그렇게 눈에 띈다.
“쉬고 나니까 매일매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아직 오랫동안 못 만난 친구도 못 봤어요. 일을 하나 집에 있으나 똑같네요.” 다니던 직장의 사정이 좋지 않게 되어 쉬게 된 직장 동료였던 분이 한 하소연이다. 혼자 사는 나도 집안일이 많은데 주부로서도 역할을 해야 하는 분이 얼마나 많은 집안일, 아이들 챙기는 것 등이 손에 잡혔을지 짐작도 안 되었다. 내 일로도 이렇게 바쁜데 다른 사람의 부탁이나 부름까지 응하고 산다면 어떻게 될까? 시간이 되는 사람이 가족끼리 또는 친구끼리 돕고 살면 어떤가? 해 줄 수 있는 것, 도와주는 것 좋다. 백수로 지내면 나도 주변으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맥 관리도 좋고 다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 모두 응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 자신의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먼저다. 다른 외부적인 요인들로부터 나의 계획이나 실천에 흐름을 깨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보내고 있는 시간은 누구나 당장 필요할 때마다 공유해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있다. 백수로 살지 않았다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말이지만 백수로 살아보니 들어맞는 말 같다. 시간이 있을 때 ‘가보지 않을 길을 가보자’는 등 ‘계획을 세워보자’는 등 이런저런 생각을 했지만 실천은커녕 손도 못 대 본 일도 많다. 백수라서 마음은 급하고, 백수지만 할 일은 많다.
나는 돈과 맞바꾼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있다. 줄 서기 아르바이트 같은 것이 있는 것을 보면 시간을 사고파는 세상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게 사고판다. 백수도 시간을 파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간에 어떤 일이라도 하면 돈을 벌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주어진 시간에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면 갑작스럽지 않게 내 시간에 방해를 받지 않는 선에게 미리 약속된 요청에만 긍정의 대답을 하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도움을 주고받을 때는 비슷한 종류의 도움으로 주고받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언제든지 부르면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할 필요가 있다. 백수라고 해서 그 시간이 공짜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