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보다 비쌌던 씨앗

육두구가 만든 세계의 선택

by 루인

오늘은 우리나라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향신료,

육두구(Myristica fragrans)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이 작은 씨앗은 한때 세계의 흐름을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육두구 나무는 오랫동안 반다 제도라는 작은 군도에서만 자랐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이 좁은 분포는 인간에게 희소성을 의미했고, 희소성은 곧 권력이 되었다.


유럽의 상인들과 국가들은 이 씨앗을 독점하기 위해 경쟁했고,

결국 무력으로 그 땅과 사람들을 통제하려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주민들을 학살하고 살아남은 이들을 강제노동체계 속에 묶어 두었다.

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폭력은 분명한 흔적을 남긴다.

육두구의 향은 사람들의 삶이 사라진 자리에서 세계로 퍼져 나갔다.


육두구(Myristica fragrans) illustration from Köhler’s Medizinal-Pflanzen (1897)

이 시대에는 도시 하나보다 향이 더 무거웠다.

전쟁 이후 사람들은 오늘날 뉴욕이 된 땅과 육두구가 자라는 작은 섬을 맞바꾸었다.


인간이 선택한 것은 넓은 공간이 아니라 향이 만들어 내는 가치였다.

그 선택은 당시 사람들이 무엇을 더 현실적인 부로 여겼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향은 손에 잡히지 않지만 그 시대에는 도시보다 확실한 권력이었다.

이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향신료가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후추와 육두구, 계피 등은 배를 채우지도 못하고 몸을 따뜻하게 하지도 않는 식물이었지만,

사람들은 홀린 듯 바다로 나아갔다.


향신료는 맛 이전에 거리였다.

그것은 얼마나 멀리 닿을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노동을 동원할 수 있는지를 드러내는 표시였다.

향은 필요가 아니라 구분의 언어였다.


한 꼬집의 향신료 안에는 수개월의 항해와 위험, 그리고 누군가의 삶이 접혀 있었다.

그렇기에 멀리 떨어진 땅과 바다,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간 사람들의 노동과 시간을 함께 소비하는 일이었다.


향은 그 과정을 지워 버린 채 결과만 남긴다.

냄새는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그 뒤에 놓인 거리와 노동도 쉽게 보이지 않게 된다.


이런 향신료를 물 쓰듯 사용하는 일은 부와 권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냄새였지만, 마치 그 향이 닿는 범위만큼 세계가 확장된 것처럼 보였다.


향을 소비한다는 것은 단지 맛을 더하는 일이 아니었다.

향신료는 자연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만든 사회적 표지였다.


그래서 육두구를 둘러싼 폭력은 더욱 기묘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생존과 거의 관계없는 물질을 위해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자연 속에서 육두구의 향은 그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화학 신호일뿐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냄새를 가치로 바꾸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사람을 지웠다.


자연은 단지 특정 장소에 식물을 놓아두었을 뿐이다. 폭력은 자연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이 희소성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권력으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향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인간은 그 향을 위해 모든 것을 요구했다.


지금 육두구는 흔하다. 시장 어디에서나 살 수 있고 특별한 권력의 상징도 아니다.

향은 그대로인데 그것이 지닌 의미만 사라졌다.


한때 도시보다 값비쌌던 씨앗이 이제는 일상의 조미료가 되었다는 사실은,

가치가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믿음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치란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오래 믿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향을 원했다. 그러나 향은 인간을 원하지 않았다.

육두구는 여전히 같은 냄새를 품고 있고 자연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달라진 것은 인간이 그것에 부여한 의미뿐이다. 향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 무엇을 지우고 있는지도 쉽게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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