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주는 꽃, 남기는 꽃

개방화와 폐쇄화, 두 가지 개화전략

by 루인

글감을 찾기 위해 자료를 뒤적이던 중, 특이한 식물을 하나 발견했다.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보이는 닭의장풀, 달개비라는 꽃이 있다.

이름은 조금 낯설 수 있지만, 꽃을 보면 누구나 “아, 그 꽃” 하고 알아볼 만큼 익숙한 식물이다.

여름 길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푸른 꽃잎 두 장이 또렷한 바로 그 식물.


그 닭의장풀의 친척 가운데 고깔닭의장풀(Commelina benghalensis)이라는 종이 있다.

제주도에서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한때 있었는데, 이 종이 특별하게 언급된 이유는 분명하다.

이 식물은 땅 위에서 꽃을 피우는 개방화를 피우는 한편,

토양 속에서는 열리지 않는 폐쇄화를 따로 형성한다.

고깔닭의장풀, 출처- 국립생물자원관(NIBR)

땅속의 꽃이라니, 쉽게 상상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꽃이 하늘을 향해 피는 기관이라고 배워 왔다.

색과 향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곤충을 부르고, 바람을 통과시키며 관계를 맺는 구조.

꽃은 본질적으로 '보이는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반면 지하의 꽃은 전혀 다른 구조를 보인다.

토양 속으로 뻗은 마디 근처에서 형성된 작은 꽃은 거의 열리지 않는다.

꽃잎은 작아져 눈에 띄지 않고, 수술과 암술은 가까이 배치된다.

꽃이 열려 외부와 접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내부를 살펴보면 장식에 해당하는 구조는 최소화되어 있고,

수정이라는 기능에 필요한 요소만 남아 있다.

이 꽃은 누군가의 방문을 기다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가 응답하지 않아도 생을 이어가기 위해 존재한다는 목적에 충실하다.


같은 종, 같은 개체 안에 전혀 다른 구조가 공존한다는 사실은 내게 흥미롭게 다가왔다.

분류학은 오랫동안 형태를 기준으로 종을 구분해 왔다.

표본 위에 남은 형질, 반복적으로 관찰되는 구조, 다른 종과 구분되는 안정적인 특징들.

우리는 그렇게 ‘대표 모습’을 추려내어 하나의 이름을 붙여왔다.


그런데 한 개체 안에서 이렇게 다른 형태가 발현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그 종의 대표 모습이라고 말해야 할까.

화려하게 열린 꽃일까, 아니면 흙 속에서 닫힌 채로 완성되는 꽃일까.

둘 중 하나를 배제하면, 그 식물은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종의 경우, 바로 그 폐쇄화라는 구조 자체가 다른 종과 구분되는 특징이 된다.

개방화와 폐쇄화를 함께 형성한다는 점은 단순한 변이가 아니라,

이 종을 설명하는 중요한 형질이다.

화려하게 열린 꽃과 흙 속에서 닫힌 꽃은 서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이 종을 구성하는 특징으로 남는다.


결국 분류학이 붙여주는 이름은 이 두 전략을 모두 포함한 채로 하나의 종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열림과 닫힘은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 같은 생을 유지하기 위한 서로 다른 방식이다.


이 선택에는 도덕이 없다. 지상의 꽃이 더 열려 있고,

지하의 꽃이 더 닫혀 있다고 해서 어느 쪽이 더 옳은 것은 아니다.

식물의 입장에서 이것은 감정이 아니라 조건의 문제다.


그 조건이란 거창하지 않다.

곤충이 충분한가, 날씨가 안정적인가, 주변 식생이 복잡한가, 교란이 잦은가.

자연에서 이런 변수는 늘 흔들린다.

곤충의 밀도는 해마다 달라지고, 비는 예측 없이 쏟아지며, 토양은 쉽게 뒤집힌다.

‘관계가 성립할 환경’은 생각보다 자주 불안정하다.

그러므로 관계만을 전제로 설계된 전략은 언제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조건은 늘 변동한다. 계절이 바뀌고, 개체군이 이동하고, 교란이 반복된다.

자연은 안정 상태보다 변동 상태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하나의 방식에만 기대는 전략은 언제든 취약해질 수 있다.

이 식물이 두 가지 꽃을 동시에 준비하는 이유도 아마 그 지점에 있을 것이다.


이 식물은 그 위험을 한쪽에만 걸지 않는다.

조건이 충분할 때는 외부를 향해 열리고,

그렇지 않을 때는 내부에서 완결한다.

전략은 환경의 함수일 뿐, 존재의 가치와는 무관하다.


우리는 대개 열려 있는 상태를 더 성숙한 모습으로 여긴다.

관계를 맺고, 설명하고, 이해받으려 애쓰는 태도를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식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기준은 조금 흔들린다.


같은 유전체를 가진 하나의 개체가 조건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겉모습은 달라도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다. 열려 있는 꽃도, 닫힌 꽃도 모두 같은 식물이다.

어느 하나가 더 본질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식물은 스스로를 평가하지 않는다.

빛을 향해 피었을 때도, 흙 아래에서 닫혔을 때도, 그저 같은 몸으로 다음 세대를 준비한다.

전략은 달라져도 존재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지상의 꽃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식물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어둠 속에서 이미 결실이 끝났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자주, 드러난 꽃만을 기준으로 삶을 판단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생은, 하늘이 아니라 흙을 조건으로 삼아 완성된다.


다만 그 선택이 언제 열림이 되고, 언제 닫힘이 되는지는 단순히 외부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같은 조건 아래에서도 다른 방식이 발현되듯, 전략은 환경과 생의 성향이 맞닿는 자리에서 결정된다.

우리는 늘 무언가에 반응하며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 반응이 곧 전부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보이는 꽃과 보이지 않는 꽃 사이에서, 어느 쪽이 더 진짜인가를 묻기보다,

그 둘이 함께 한 생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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