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얻지 못한 식물들

종이 되지 못한 표본들에 대하여

by 루인

나는 표본관에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
조용하면서도 적막한 분위기, 그리고 차곡차곡 쌓여 있는 식물 표본에서 나는 향은
이 공간을 관찰과 사색을 위한 장소로 만들어준다.


금속 캐비닛을 천천히 열면,
얇게 눌린 식물들이 종이처럼 펼쳐진 채 누워 있다.
채집된 장소와 날짜, 채집자의 이름은 또렷하게 적혀 있지만,
그 식물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비워진 경우도 적지 않다.


표본은 존재하지만, 종은 아니다.

이름이 없는 식물들은 대개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정리된다.
이미 알려진 비슷한 다른 종에 묶여 하나의 변이로 취급되거나,
혹은 끝내 판단이 내려지지 않은 채 ‘미동정’이라는 말 아래에 남는다.


이런 표본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표본관의 한쪽에서, 누군가가 다시 꺼내기 전까지 조용히 잠들어 있을 뿐이다.
서랍은 잘 닫혀 있고 라벨도 정리되어 있지만,
그 안에 놓인 식물들이 모두 같은 속도로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해야 분류학자가 이야기하는 ‘종’이 될 수 있었을까.


식물 표본들, Photo by Lucas George Wendt

종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비교가 필요하다.

단독으로 놓인 표본은 그 자체로는 많은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이미 이름을 가진 기존의 종들과 나란히 놓였을 때에야, 그 식물만이 지닌 특징이 비로소 드러난다.

분류학의 대부분의 판단은, 이렇게 나란히 놓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그 차이는 우연히 나타난 변이여서는 안 된다.

개체마다 들쭉날쭉하지 않고, 여러 표본에서 반복해서 확인되는, 비교적 고정된 특성이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식물들은 이 조건을 통과하지 못한다.

차이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을 하나의 종으로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거나,

어떤 표본에서는 보이지만 다른 표본에서는 사라진다.


차이는 있으나 일관되지 않고, 특징은 있으나 경계를 만들기에는 모자란 상태다.

그 애매함 앞에서, 많은 식물들은 다시 표본관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돌아온 표본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판단이 보류된 채로 남는다.


분류학에서 이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있다. ‘미동정’.

아직 무엇인지 결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틀렸다는 의미도, 의미 없다는 뜻도 아니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아주 잠정적인 상태를 가리킬 뿐이다.


미동정으로 남는다는 것은 관찰이 부족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비교 대상이 아직 충분히 모이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지금의 분류 체계가 그 차이를 설명할 언어를 아직 갖고 있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그래서 미동정 표본은 실패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아직 결론에 이르지 못한 질문에 가깝다.

그 질문은 당장 답을 요구하지도, 서둘러 정리되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적절한 조건이 갖추어질 때까지, 조용히 남아 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 기준이 바뀌면, 미동정으로 남아 있던 표본들은 다시 꺼내진다.

새로운 비교 대상이 늘어나고, 이전에는 설명되지 않던 차이를 읽어낼 언어가 생기면

그 식물은 다시 질문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그때 어떤 표본은 이미 알려진 종의 범위 안으로 조용히 묶이기도 하고,

어떤 표본은 끝내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혼자 떨어져 새로운 종이 되기도 한다.


이름을 붙이는 작업에서, 분류를 하는 과정에서 나 역시 무심코 지나쳐온 종들이 있었을 것이다.
충분히 들여다보지 못한 채 넘겨버린 차이들,

가능성이었을지도 모를 표본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때로는 판단을 보류한 채 물러나면서,

조금 더 붙잡아 보았으면 어땠을까 하고 뒤늦게 돌아보게 되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분류학을 배우면서
판단을 미루는 일 또한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두르지 않는 결정,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한 판단 역시
실패라기보다는 책임의 다른 형태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표본관의 미동정 표본처럼, 내 결정 또한

아직은 불릴 언어가 준비되지 않은 채, 언젠가 그 가능성을 알아볼 누군가를 기다리며

잠시 시간을 건너고 있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이전 22화다른 뿌리를 딛고 같은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