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 사장님이 40대에 회사원이 되었다.-26
드디어 권태기
20살때부터 줄곧 자영업을 해온 나에게 주말은 고단함의 의미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휴식같은 시간이었겠지만......
명절 당일 날을 제외하고 늘 가게는 오픈 상태였다. 요즘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은 정기휴일을 정해서 가게를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왜 그리 아둥바둥 몸부림치며 살았는지, 후회보다 아쉬움이 남는다.
남들 다가는 여행 한번 못 가보고, 나는 늘 삶의 터전을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살처럼 기력이 없고, 온 몸이 쑤시고 아프기 시작했다.
가게 오픈시간 전에 병원에 들렸다.
"젊은 사람이 너무 몸을 혹사시켰네요. 잘때 푹 자고, 쉴때 푹 쉬고 그래야 피로도 풀리는데......"
꽤 연세가 있어 보이는 의사 선생님이 말꼬리를 흐렸다.
호프집을 운영하고부터는 생활패턴(밤낮)이 바뀌어서 과로가 쌓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식을 권장하는 의사 선생님께 처방전을 받아왔다.
하지만, 처방약은 육체적 피로에 대한 처방일 뿐이었다.
"골뱅이 무침 하나에 과일 하나요!"
주방으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전혀 신이 나지 않았다.
평소엔 주문이 밀려드는 상황을 은근히 즐기곤 했다.
바쁘다는 것은 곧 돈과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오늘만큼은 만사가 귀찮고 피곤했다.
요리하는 사람이 요리하기 싫어지면 그날 요리는 망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정성이 가득 들어가도 매번 만족할만한 맛이 나오진 않는다. 하물며 억지로 만드는 음식이 맛있을리가 없다.
대충 대충 만들어 낸 요리로 제 값을 받는다는 건 손님에게 미안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 오늘은 자기가 주방좀 맡아 줘."
남편과 포지션을 바꿔 카운터에 앉았다.
카운터에서는 손님을 응대하고 계산을 하며 홀이 바쁠땐 아르바이트 학생들과 함께 테이블 정리도 하고, 주문도 받는다.
두 번째 주방 이모의 조언대로 우리 부부는 멀티가 되어 언제 어떤 상황이 닥쳐도 능수능란하게 일을 해냈다.
근 15년을 장사에 매달려 시계 초침처럼 살아온 나에게 드디어 권태기가 찾아왔다.
시장통의 채소가게와 신발가게 그리고 대학가 호프집.
내가 선택한 길이었지만, 하고 싶은 일이라기보다 생계형 직업이었다.
그로 인해 때로는 예의없는 손님(진상)에게 가식적인 미소를 흘려야 했고, 마음에 없는 말을 내뱉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와
같은 멘트는 진심일때도 많았지만, 더러 빈말인 경우도 허다했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유일한 내 길인가?' 라는 의문이 작은 혹처럼 자라나기 시작했다.
길고 긴 인생에서 그냥 그렇게 살아지는 삶 말고, 진짜 내 삶을 찾고 싶었다.
한번 자라난 혹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고, 점점 내 몸과 정신을 점령해 나갔다.
삶에 변화를 주지 않는다면 혹은 점점 암덩이처럼 서서히 나를 죽여 나갈 것만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출근하는 길에 퇴근을 하고, 퇴근하는 길에 출근을 한다.
그 평범한 일상에 대한 동경이 점점 나를 갉아 먹었다.
한번 벌레가 갉아먹기 시작한 나무는 벌레를 잡기 전까지 온전한 나무가 되지 못한다.
온전하지 못한 나는 오랫동안 무기력한 시간속을 헤매고 다녔다. 가게 오픈 전 장을 보고,청소를 하고, 손님을 대하고, 다시 테이블을 치우고 정산을 하고 마감을 한다.
그 과정들이 지루하고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쯤 여유로운 삶을 살아도 되지 않을까?
근 15년을 앞만 보고 달렸으니, 쉬어가는 타이밍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침 남편 친구가 가게에 호감을 가졌고, 그 친구라면 가게를 잘 꾸려 나갈거라고 판단했다.
물론 세입자를 선정하는데 있어서 자격을 운운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왕이면 가게 일에 성향이 잘 맞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마주 앉아 임대차계약서를 쓰기 시작했다.
드디어 권태기로부터의 해방감에 시원섭섭한 묘한 감정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앞으로 내가 가야 할 낯선 길 , 그 길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종이 한 장 위에 교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