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로그 EP 17
언젠가 꼭 한 번은 타보고 싶은 차를 '드림카'라고 한다. 보통은 페라리 같은 최고급 차량을 꼽는 경우도 있고, 나이가 들어 현실을 인지하면 벤츠나 BMW의 고급 모델로 눈을 낮추는(?) 경우도 있다. 나만 없는 돈이 넘쳐나는 세상이라 독일 3사 차량은 이제 흔하다는 말까지 나오지만 말이다. 다만 나의 드림카라는 건 딱히 없었다. 차에 대해서는 실용적으로 접근한 탓일 수도 있겠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산 첫 차는 경차였고, 그 이후에도 아반떼급의 소형차들만 몰았다. 내가 예상한 내 인생의 마지막 차는 소나타, 잘하면 그랜저였을 정도로 별 로망이 없었다.
아니 로망이 없다는 것보다는 자동차라는 소모성 제품에 큰돈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는 게 더 솔직한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차에 관심이 없던 건 아니었다. 나라고 왜 좋은 차가 싫겠는가?! 혹시나 돈 많이 벌면 벤츠 E클래스 정도는 한 번쯤 몰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또 하나, 미니 쿠퍼에 관심이 있었다. 동글동글 귀여운 외모에 보통은 원색을 띈 '외제차'. 대체로 어린 여성분들이 관심을 가질법한 차량이어서 아재가 몰기엔 어울리지 않는 그 미니 말이다.
배우자와 캠핑을 갔던 어느 날이었다. 지금 타는 차를 몇 년 더 타는 게 돈 아끼는 길이라는 생각#1과 운전을 그렇게 자주 하는데 한 번은 맘에 드는 거 타보는 게 좋지 않겠냐는 생각#2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생각 #2를 하게 된 계기는. '앞으로 죽기 전까지 4대 정도의 차를 만나볼 수 있을 것 같다. 어차피 몇 대 더 못 타볼 텐데, 나만의 공간에 투자를 해도 되겠다.'는 이야기를 당시 팀원들과 나눴던 영향이었다. 배우자와 나는 각자의 차를 운행 중인데, 배우자는 자신의 차에 대해 매우 만족해했다며. 오빠도 그런 만족감을 느껴보라고. 매우 달콤한 응원을 해줬다.
우리는 다음날 캠핑을 마치고는 집 근처의 미니 매장으로 달려갔다. 미니의 대표 색상이라고 할만한 녹색(정식 명칭은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 클럽맨 모델을 골랐다. 벌써 골랐냐고? 맞다. 그날 계약서 작성하고 몇 주 후에 차 받았다. 일부 선입금을 내고, 나머지는 제조사의 할부를 이용했다.
우선 클럽맨은 5인승(사실상 4인승) 차량으로, 문짝이 두 개 밖에 없는 미니 쿠퍼에 뒷 문을 달고 앞뒤로 늘려놓은 듯한 모습이다. 특이할만한 점은 트렁크가 냉장고 마냥 좌우로 한 짝씩 열리는 것이다. 당시 캠핑을 열심히 다니던 우리는 2열을 폴딩 하면 차박도 가능하겠다는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구매 전에 이미 내 키엔 좁은 것을 알아챘음에도, 그땐 어떻게든 욱여넣으면 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미니 특유의 계기판과 실내 디자인은 다른 모델과 같다. 많은 게 디지털화되었음에도 아날로그인 척하는 디자인적인 요소도 많다. 확실히 '이 차 멋있다.'는 평가보다는 '귀엽다'는 소리 듣는 쪽으로 특화된 차량이다.
나는 이 클럽맨을 MINI > 민희 > '휘'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특별 관리하기 시작했다. 진작에 접었던 셀프 세차 용품을 다시 챙기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 쓸 수 없는 것들은 새로 주문했다. 같은 길이라도 혹여 기스라도 날까 봐 전보다 더 조심하며 살금살금 다녔다. 그리고 햇빛과 눈, 비에 노출시킬 수 없어 몇 년째 지하주차장에만 주차하고 있다.
다만 요즘 내 차의 활용도가 엄청나게 떨어져 있다. 내가 일을 안 하기 때문이다. 그 전엔 한 달에 2~3천 킬로를 우습게 채울 만큼 지방 출장이 잦았는데, 이젠 '내 차 잘 있나?' 생각이 날 정도로 운전할 일이 없다. 배우자와 가끔 지하 주차장을 들러 잘 살아 계시는지 확인만 할 뿐. 운행을 하지 않으니 세차할 일도 없고, 어쩌다 운전대를 잡으면 이게 내 차 맞나 싶을 정도로 어색하다.
할부는 이미 다 갚았고 현재 활용도는 매우 낮지만, 처분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차를 타면서 나의 아이덴티티를 이 쪽으로 정립을 했다고 해야 하나? 아직도 가까운 곳에 갈 때면 배우자의 차를 먼저 이용할 만큼 보호를 받는 존재다. 흔한 아재 감성과는 거리감이 있을지라도 나의 드림카를 갖는다는 그런 기분. 차는 이성이 아닌 용기로 산다는 말처럼 꼭 한 번 느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