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나갔다가 수지 엄마를 만났다.
까만 수지 대신, 하얗고 작은 강아지를 데리고 있었다.
안색을 보니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수지는요?”
“보냈어요.”
그걸로 충분했다.
“얼마나 됐어요?”
“2, 3주.”
이제는 애도의 시간이다.
“어떻게 갔어요?”
며칠을 밥도 안 먹고 소리만 지르며 아파하더니 마지막 까만 변을 봤다고 했다.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결국 안락사를 했다고.
“눈앞에서 가는 거 다 보니까 마음은 편했어요.”
헤어지기 전에 수지 엄마가 물었다.
“없으니까… 어때요?”
“저도 17년 키우다 보냈잖아요. 약 먹이고 씻기고… 힘들었지요. 이젠 편하고 자유로워요.”
편하다는 말이 내게도 생경하지만 사실이었다. 그 말은 사랑의 끝이 아니라 돌봄의 끝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관계는 감정만으로 유지된 게 아니었다.
시간과 손, 그리고 책임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래서 그 끝에 남은 건 한 존재라기보다 해야 할 일들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묵직했던 무언가가 사라진 빈자리가 남았다.
사람들은 왜 반려동물을 키울까.
사람은 상처를 주고, 관계는 자주 어긋난다.
한 번 눈 맞추면 평생을 주는 존재.
배신하지 않고, 먼저 등 돌리지 않는 존재.
어쩌면 사랑이 아니라 사람에게 지친 마음이 고른 피난처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피난처에도 끝이 있다. 그 존재는 우리보다 먼저 아프고, 먼저 늙고, 먼저 떠난다. 상처를 피하려 했는데 결국 가장 속수무책인 방식으로 묶여버린다.
사랑은 선택할 수 있어도, 돌봄은 선택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