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호 직관의 힘
누리호의 발사 장면을 직관?하고 나서 달라졌다. 누리호..너란 녀석은 대체 어떤 녀석이길래 무관심한 내 가슴에 꽂힌 걸까.
우주 과학에 큰 관심이 없는 편이다. 다들 갖고 있는 호기심 정도 수준이지, 케로신이니 액화산소니 산화제, 페어링 분리 등등 다소 전문가적인 요소엔 문외한이다. 과기부를 맡으면서 누리호 3차 발사 취재 현장으로 가라는 부장의 지시에는 솔직히 반감부터 들었다.
전남 고흥에 있는 나로우주센터. 나도 호남 출신이지만 고흥이 또 어디인가. 남도에서도 저기 끝단. 지도로 보면 서울에서는 사실상 한반도 남해안 끝단으로 이동해야 하는 셈이다. 실제로 KTX를 타고 순천으로 2시간 반 정도 이동 후에 추가로 버스를 타고 고흥까지 1시간 30분 정도를 달려야 도착하는 곳이 고흥이다. 교통편만 기본 4시간이다.
그런데 거길 가라고? 고작 비행기처럼 생긴 고철 덩어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을 하나 보자고. 기자에게 출장은 해외가 아닌 이상 사실 고난의 연속인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의 경우엔 해외 출장도 고역이다. 아무튼 갔다. 월급쟁이는 힘이 없기 때문에 고흥에 도착했다. 나쁘지 않았다. 클리셰처럼 말하자면 서울보다 공기가 좋았고 신록이 푸르른 5월이었기 때문이다. 상황은 급변했다. 1박 2일 일정으로 계획된 출장은 발사를 2시간 앞두고 발생한 중단 사태로 인해 하루가 더 늘어났다.
일은 많고 짜증이 밀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오후 5시 30분에는 서울 본사에서 앵커와 생방송으로 연결하는 CT가 예정돼 있었다. “고흥에 나가있는 이정주 기자 연결해보겠습니다. 이 기자, 현지 상황이 어떤 가요?” 맞다. 자주 듣던 그 약속 대련 같은 방송 말이다. 크로스로 토킹을 해야 하는 CT의 가장 큰 약점은 실시간 상황을 반영해야 한다는 점이다. 글로 쓰는 박스 기사도 물론 쓰지만, 그나마 박스 기사는 수정이 가능하다. 아니 구체적으로 말하면 출고 전에 수정할 기회가 있다. 글로 쓰는 모든 매체가 대체로 동등한 조건이다.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크게 물을 먹을 일이 없다.
CT는 다르다. 이번엔 또 달랐다. 산화제 충전은 당초 오후 5시 40분에 완료되기로 돼 있었는데 이게 뭔가. 5시 20분에 이미 채워졌다. 앵커에게서 5시 30분에 전화가 온다. 상식적으로 이미 5시쯤에 원고를 다 써서 넘겨놨고, 우리는 짜고 치는 듯한 약속대련을 하면 끝인 상황이다. 그런데 실전 대련으로 돌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실시간으로 현지 상황의 변화가 마치 작두를 타며 중심을 잡으려는 나를 계속 흔들어댔다. 그럼에도 청취자들이 실시간으로 정보를 받을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내가 말하는 시점에는 적어도 해당 뉴스는 최신이어야 한다. 그게 프로다. 프로의 세계는 냉엄하다.
하루 미뤄진 일정 탓에 CT만 24일 수요일, 25일 목요일 두 차례 치렀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오후 6시쯤 CT를 끝내고 나면 내겐 박스 기사가 남아 있다. 이젠 방송이 아니라 신문 모드로 전환이다. 오후 7시에 다시 출근하는 기분이다. 그렇게 연 이틀 동안 새벽 3시를 넘겨 잠자리에 들었다. 이 정도 당해보면 공감이 될 것이다. 아무리 이 일을 사랑한다고 해도 한계치에 도달하기 십상이다.
그런데...드디어 결전의 시간. 5월 25일 오후 6시 24분. 누리호란 녀석이 발사하는 모습을 봤다. 아니 정확히는 소리를 먼저 들었다. 전문용어로는 소닉 붐. 저기 산등성이 너머에서 뭔가 중세 시대 어디 동굴에서 자고 있던 용이 깨어나는 듯한 소리랄까. 구르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산 너머로 누리호가 등장했다. 꼬리에는 붉은 불빛을 달고 하늘 높이, 정말 하늘 끝까지 날아갔다.
뭔지 모를 전율과 함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전율과 함께, 방금까지 쌓였던 피로와 불만들이 사라졌다. 말 그대로 사라졌다. 이유는....모르겠다. 왜 무려 48시간 동안 쌓인 부조리가 단 1분 만에 사라졌는지 나도 모르겠다. 직관의 힘일까. 오늘부터는 진짜 우주를 사랑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