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나를 죽여줘 내가 가지 못하게 내가 가질 수 없게 내가 커지지 않게
오늘은 조금 특별한 영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라는 2014년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아름다운 미장센과 음악, 흑백영화의 레트로함이 함께 묻어나는 애나 릴리 아미푸르의 영화입니다. 한국에는 시네필이신 소지섭 배우님의 노력으로 수입될 수 있었네요. 소지섭 배우가 수입한 해외영화들은 참 실패할 일이 적은 것 같아요. 믿고 보게 됩니다. 그리고 감독을 꼭 소개하고 싶어요. 만약 이름만 듣고 어디서 들어본 감독인데?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대단하신 겁니다. 해당 감독이 감독한 영화 중 국내에 잘 알려진 영화는 전종서 배우의 할리우드 데뷔작 <모나리자와 블러드문>이 다이니까요. <모나리자와 블러드문>은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와는 정반대로 화려한 색감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는데요. 저는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를 훨 좋아하는 편입니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좋아하시거나 힙한 예술영화가 끌리시는 분들께 추천드려요.
그리고 영화 외적인 이야기를 잠깐 하고 싶은데요. 실은 얼마 전에 제가 구독한 분들 대부분을 취소했습니다. 제가 구독한 분들의 글이 올라오면 좋아요를 누르고 읽거나 읽고 누르거나 아무튼 꼭 읽어보는 편이었는데요. 언제부턴가 부담이 되더라구요. 제가 읽고 진짜 좋았거나 애착이 가는 글들만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구독자가 상대적으로 적으신데도 불구, 퀄리티가 괜찮은 글을 꾸준히 올리시는데 구독자가 더 느셨으면 좋겠다, 차마 구독 취소할 수가 없다하는 분들 10분만 남기게 되었어요. 사실 제가 먼저 구독하여 답례로 구독해 주신 분들도 계실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 쓰면서도 혹시 제 글이 무례가 되는 것은 아닐까 조금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제 행동에 대한 생각을 밝히고 싶은 마음이 더 커 이렇게 솔직히 다 써버리게 되었네요. 제 브런치의 경우에도 잘 안 읽으시거나 읽기가 부담되신다면 언제든지 구독 취소하셔도 괜찮으시고 부담가지실 필요없다는 점 말씀드립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제 부족한 글을 계속해서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 또 드립니다. 그럼 이제 영화 이야기 시작하겠습니다.
이 영화의 매력의 일부는 독특하게도 영화의 배경에서 나옵니다. 이란의 한 가상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뱀파이어 여주인공도 히잡을 쓰고 있습니다. 주연배우들도 이란인이죠. 고딕 호러 영화가 배경이 이란이라는 점도 독특한데 영화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영화의 색감이나 음악 선정을 보면 느끼시겠지만 영화의 흑백화면과 연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여주인공의 취미 등 모든 소도시의 소재들은 이란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국의 그것과 좀더 닮은 면이 있죠. 소년 아라쉬는 마약을 판매하고 소년의 아버지 후세인은 마약중독자입니다. 치안이 엉망인 도시에는 차가 돌아다니고 아라쉬는 가죽바지와 흰 반팔, 가죽재킷을 입고 밤도시를 돌아다닙니다. 전형적인 미국의 빈민촌이죠. 영화의 형식도 최근 개봉한 <노스페라투>와는 달리 전형적인 고딕 호러보다는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에 가까워 보입니다.
왜일까요? 왜 감독은 이렇게 복잡한 짬뽕 배경을 선택했을까요? 제 생각에 이는 자신의 배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미푸르 감독의 뿌리는 이란이지만 그녀는 캘리포니아에 사는 미국인입니다. 영화의 배경은 그녀의 배경과 놀랍도록 닮아있죠. 그녀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 중인 두 국가, 이란과 미국의 뿌리가 뒤섞인 삶에 대한 외로움을 이야기한적이 있습니다. 뱀파이어와 아라쉬는 그러한 그녀의 문화적인 소외감과 정체성의 혼란을 그대로 투영한 인물들인 셈입니다. 그러한 감독의 배경과 영화의 배경, 조용하고 우울한 인물들, 흑백화면과 잔잔한 음악에 뒤섞여 상당한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전달해준다는 점이 영화의 묘미가 아닐까싶네요.
이제 안 보신 분들을 위해서 줄거리를 간략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소녀는 밤이 되면 남자들을 잡아 피를 빨아먹고 사는 뱀파이어입니다. 소녀는 어느날 밤 마약에 취한 외로운 소년을 만나게 되고 둘은 사랑에 빠집니다. 소년 아라쉬의 아버지 후세인은 아라쉬가 모은 돈을 마약을 사는데 다 써버리고 사창가로 향합니다. 그가 사창가에서 한 여성에게 마약을 주사하고 겁탈하려하자 소녀는 소년의 아버지를 죽여버리죠. 아버지의 죽음과 연쇄살인이 일어나는 도시의 환경에 질린 소년은 소녀와 함께 도시를 떠납니다.
그리고 인상깊은 연출과 장면들을 보기 전 마지막으로 결말 해석을 하고 싶습니다.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어요. 보실 분들은 이제 멈추어주세요. 떠나기로 결심한 소년은 소녀의 집을 찾아갑니다. 말없이 소년의 말을 듣던 소녀는 짐을 챙기기 시작합니다. 소녀가 챙기던 피해자들의 수많은 시계들을 우연히 보게 된 소년은 소녀의 발목을 싸고 도는 아버지의 고양이를 보게 됩니다. 소년과 소녀는 차를 따고 떠나는데 소년은 갑자기 차를 멈춰세웁니다. 차에서 내린 소년은 앞에서 왔다갔다하며 고민에 빠집니다. 그리고 결정을 내리죠. 헤드라이트가 반짝 켜집니다. 신나는 음악이 차에 흐르고 기타 선율이 귀를 간질이는 가운데 우울한 눈빛의 소년과 소녀는 도시를 떠납니다.
결국 소년은 소녀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소녀가 뱀파이어라는 사실도 깨달아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소년에게는 빈민촌 도시의 현실이 더 잔인했고 소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짙었을지도 모르죠. 결국 소년은 소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떠나기로 한 것입니다. 반대로 소녀도 소년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소년이 서성이는 동안 소녀는 기다려주죠. 소년을 사랑하게 된 뱀파이어는 마찬가지로 소년의 결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에요. 위에 제가 설명한 장면들은 대사가 하나도 없는데요. 오직 소년과 소녀의 표정과 눈빛, 행동만으로 심리를 파악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다른 영화와는 다른 차별점을 드러내주기도 했었구요.
인상 깊은 장면과 연출들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제가 길게 늘어놓은 결말부 장면이 있죠. 그리고 흑백영화 특성상 색감이 아무래도 부족한데요. 영화는 밤의 빈민촌을 가로등의 불빛을 통해 선명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로등의 불빛들과 헤드라이트 불빛 등은 검은 화면에서 영화의 로맨틱하면서 우울한 분위기를 절묘하게 드러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소녀가 야밤에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장면들은 아름다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소녀가 쭈뼛쭈뼛 벽에 기대어 스케이트보드를 밀고 가는 장면이었고요. 하나는 텅 빈 도로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소녀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로우 앵글로 잡은 장면이었는데요. 전자는 탈출할 수 없는 도시에 사로잡힌 소녀와 소녀의 모습을 거대한 벽을 강조함으로서 드러냄과 동시에 포식자 뱀파이어인 소녀의 정체와 대비되는 서툴고 귀여운 모습도 동시에 보여주어 좋았습니다. 후자는 뭐랄까, 밤의 자경단처럼 일종의 도시 청소부 역할을 겸하고 있는 소녀의 영웅적인 면과 살인자인 소녀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주었네요. 원체 위의 장면들이 아름답기도 했었구요.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시퀀스는 소년과 소녀의 첫 만남이 아닐까 싶어요. 할로윈 파티에서 마약에 취해 위태로운 모습을 한 뱀파이어 분장의 유약한 인간 소년과 히잡을 쓴 유약한 소녀의 모습을 한 포식자 뱀파이어가 가로등 아래에서 사랑에 빠지는 장면의 아이러니도 좋았고요. 치안이 안 좋은 도시에 홀로 걸어가는 소녀를 걱정하는 소년과 그런 소년과 사랑에 빠지면서도 동시에 경계하는 소녀의 모습도 아름다웠어요. 특히 소녀는 소년의 걱정과는 달리 사냥을 하러 가던 길이라는 사실이 제 마음을 더 오묘한 달달함으로 채웠습니다. 소녀의 방에서 흐르는 음악과 뱀파이어 분장의 소년이 소녀의 목을 감싸안는 장면까지 이어지는 시퀀스의 마지막 부분도 좋았어요. 뱀파이어들이 보통 목을 물어뜯는다는 점에서 인상깊기도 했죠. 소년이 소녀에게 뱀파이어가 보낸다며 시간과 장소를 적은 쪽지를 남기는 장면도 같은 이유로 그랬고요.
마지막으로 귀여운 부분이 몇몇 있습니다. 조용한 소녀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장면도 귀여웠지만 엔딩 크레딧에 당당히 점멸하는 후세인의 고양이 역을 맡은 동물배우도 저를 웃음짓게 했네요. 독특하고 아름다운 예술영화, 문화적인 뒤섞임과 외로움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노래한 호러영화이자 로맨스영화, 뱀파이어 영화.
애나 릴리 아미푸르의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입니다.
평점 4/5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