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구두 한 켤레 앞에서] 이른 새벽, 아직 찬 기운이 가시지 않은 공기를 맞으며 출근 준비를 하다 문득 신발장 앞에 섰다.
무심히 문을 여는 순간, 오래 묶여 있던 구두 한 켤레가 눈에 들어왔다.
3년 전쯤, 별다른 이유 없이 우연히 사 두었던 반지퍼 구두였다.
오늘은 왠지 이 구두를 신고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너무도 오랜만에 구두를 신는 날이었다.
40대, 50대 초반까지 왕성하게 직장 생활을 하던 시절을 떠올려본다.
그때의 나는 구두 매니아에 가까웠다.
마음에 들면 사고, 자주 신고, 또 아무렇지 않게 버리곤 했다.
구두는 늘 많았고, 그만큼 가벼운 존재였다.
하지만 지난 5년간, 나는 한 번도 구두를 신지 않았다.
오늘 신은 이 구두는 ‘묵어 있던 구두’이지만, 사실은 단 한 번도 길 위를 밟아보지 못한 새 구두였다.
그래서일까. 여전히 고운 광택을 머금고 있었고, 겨울 구두 특유의 온기가 발을 감싸왔다.
발을 넣는 순간, 왜 이제야 이 구두를 꺼내 신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때 문득 마르틴 하이데거의 문장이 떠올랐다.
> “한 켤레의 구두 속에는 대지의 고단함과
길 위를 걸어온 삶의 침묵이 깃들어 있다.”
― 하이데거, 『예술 작품의 근원』
구두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시간과 노동, 그리고 삶의 궤적을 품은 존재라는 말.
아직 한 번도 길 위를 걷지 않았던 이 구두에도,
이미 나의 시간이 스며들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신지 않고 흘려보낸 시간, 멈추어 있던 나날들,
그리고 다시 걸어 나가야 할 앞으로의 길까지.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 켤레의 구두 속에는, 내가 걸어온 시간과 앞으로 걸어갈 침묵이 함께 들어 있다.”
오늘 아침, 나는 그 침묵을 신고 다시 길 위에 섰다.
조용하지만 분명한 발걸음으로...
- 우풍 정영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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