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는 2022년에 개봉한 정지연 감독의 첫 장편영화다. 2018년에 첫 촬영을 들어갔으니, 촬영부터 개봉 단계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 작품이다.
YBC 보도국 간판 앵커 ‘정세라(천우희)’에게, ‘그 사람’이 집에 침입해 자신의 딸을 죽였고 곧 자신도 죽일 것이라는 제보 전화가 걸려 온다. 세라는 이를 장난 전화로 치부하고 끊어 버리지만, 이후 찜찜함을 느껴 엄마인 ‘이소정(이혜영)’에게 털어놓는다. 소정은 이것이 '진짜 앵커가 될 기회'라며 직접 취재에 나설 것을 종용하고, 세라는 제보자인 ‘윤미소(박세현)’의 집에서 미소와 딸의 시신을 발견한다. 이 사건을 최초로 보도하면서 방송국 내 세라의 입지는 커지고, 세라는 후속 취재를 하던 중 미소의 주치의였던 정신과 의사 ‘최인호(신하균)’를 만나면서 사건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성이면서 아나운서 출신 앵커로 살아가기
세라는 아나운서 출신 앵커다. 아나운서는 원고를 읽는 사람이라면 앵커는 뉴스 내용을 정리, 해설해 보도하는 사람이다. 전자보다 후자가 뉴스 원고에 개입할 자유도가 높다고 들었다. 그러다 보니 아나운서에게는 앵무새라는 멸칭이 따라붙는다. ‘여성’ 아나운서에 대한 표현은 ‘앵무새처럼 프롬프터 읽는 예쁘장한 여자’처럼 더욱 모욕적이다. 이 때문에 일 욕심 있는 여성인 세라는 모종의 열등감을 가진 인물이다. 고작 3개월 된 수습기자로 남더라도 기자 타이틀을 따려고 한 이유 또한 취재 경험이 없다고 무시당하는 게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 아나운서의 수명은 짧다. <앵커> 속 YBC 뉴스룸의 여성 아나운서는 변화하지만, 남성 아나운서는 늘 같은 사람이라는 점은 업계의 어두운 속사정을 특별히 깊게 파고들어야만 할 수 있는 고증은 아니다. 여성 아나운서의 생태 구조에서는 여성들은 더 어리고 더 예쁜 여성과 경쟁해야 하며, 나이가 들거나 결혼하면 경쟁에서 밀려나는 구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에서 오는 긴장은 세라의 후배 서승아(박지현)와의 갈등으로 드러난다. 세라와 승아는 사사건건 대립하고 서로를 견제한다. 이 갈등이 개인 차원의 문제에서 벌어지는 게 아니라 구조의 문제에서 발생하는 일이며, 여자가 여자의 적인 것이 아니라 여자가 여자의 적이 되도록 여성을 몰아넣는 구조가 문제라는 사실은 영화 곳곳의 표현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다.
부모와 자녀 분리하기
미소로부터 제보 전화를 받은 세라는 이것이 자살로 위장한 살인 사건임을 확신하지만 경찰 수사에 의해 미소가 자녀를 살해한 후 자살한 사건으로 판명 난다. 우리나라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을 동반자살 사건으로 보도해 왔다. 또 이를 온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경우도 많았다(‘얼마나 힘들었으면’ 같은). 승아의 말처럼 자녀를 살해하고 자살을 택하는 부모가 “악의를 가진 살인자”는 아니겠지만, 세라의 말처럼 관점은 바뀌어야 한다.
요즘은 ‘자녀 살해 후 자살’이라는 표현을 잘 사용하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다. 그럼에도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들이 ‘살해된 자녀에 대한 생각을 거의 하지 않게 만드는’ 이유는, 자녀가 부모의 소유물처럼 여겨져 온 역사 때문이다. 자녀가 자신의 소유물이니 자녀의 생명권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사건을 보면서 자녀도 부모를 따라 죽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 부모에게 자녀를 돌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주장했겠지만, 자녀 살해 후 자살은 결국 돌봄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이것은 자녀에 대한 책임감이 아니라 자신과 자녀를 분리하지 못하는 착각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부모가 아니면 자녀를 돌볼 수 없다는 사고방식의 결과이며 돌봄 노동을 오로지 부모에게 전가하고 방치하는 사회가 만든 문제다.
<앵커>는 미소를 통해 미혼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 사례를 다루고 있다. 미혼모는 그 특성상 사회와의 단절과 고립을 겪는 경우가 많아 도움을 청할 곳이 부족하다는 점이 해당 사건의 가장 큰 문제이다. 미혼모뿐만이 아니다. 이러한 사건이 장애 아동이 사는 가정, 생활고를 겪는 가정 등 취약계층에서 많이 발생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은 개인을 비난하는 데서 그칠 수 없는 문제임을 시사한다. 사회 안전망 구축은 물론, 가정에 대한 촘촘한 복지와 지원이 필수적일 것이다.
모성애 신화 전복하기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모성애를 숭배해 왔다. 모성애에 대한 강력한 숭배는 ‘엄마는 대단하다’로 종결되기도, ‘엄마라는 여자가 어떻게 저래’로 귀결되기도 했다. 하지만 <앵커>는 그 모성애 신화를 전복하는 이야기이다.
영화 후반부에서 소정이 사실은 앵커를 꿈꿨던 아나운서였고, 임신으로 인해 포기한 꿈을 딸 세라가 이뤄주길 바랐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소정이 세라에게 “임신 조심하”라고 말했던 것 또한, 임신으로 세라의 커리어가 무너질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 엄마의 못 다 이룬 꿈을 딸이 대신 이루어 소원을 성취해 주는 스토리는 어디서 많이 접한 느낌이 든다. 그 소원을 떠맡게 된 딸이 받는 압박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들어보았다. 그래서 소정의 대사 “엄마는 말이야, 결국 너야. 우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완전한 하나거든”은 해리성 인격 장애를 가진 세라가 소정을 놓지 못함을 표현함과 동시에, 엄마와 딸을 분리하지 못한 소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대사인 “너만 없었다면 이 자리는 내 것이 될 수 있었어”는 의미심장하다.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것은, 내 일과 내 커리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아이가 꿰차고 들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일과 내 커리어가 무너지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며, 누구나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미워하게 된다. 그렇기에 ‘내가 낳았지만 아직 낯선’ 이 생명체를 사랑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동시에 미워하기도 하는 애증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인호가 미소와의 상담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미소는 딸이 밉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괴롭다고 말한다.
모성애 신화는 여성들로 하여금 무엇을 잃게 만들었는가? 또 무엇을 말하지 못하게 만들었을까? 일련의 질문들을 따라가다 보면, 모성애 신화는 모성애 없는 엄마를 나쁜 엄마로 낙인찍는 폭력의 기제로 작용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결국 윤미소-정세라-이소정은 결국 골자를 같이 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임신, 출산, 육아에서 철저히 약자가 되는 여성이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잃어버리는 두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아이가 반갑지만은 않다. 버겁고 고통스러울 때도 많다. 이걸 증명하면서 <앵커>는 기존의 모성애 신화를 뒤집는다.
나가면서
영화는 세라의 아이도 건강하고, 세라도 자신이 ‘여기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정지연 감독은 일과 육아 중에 무엇인지 더 옳은지 결론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따라서 <앵커>는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결국 내가 지금, 여기 이곳에 살아있음을 느끼면서 트라우마에서 해방되는 이야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