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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흑흑 Feb 29. 2024

영화 ‘듄’ 시리즈의 마키아벨리적 해석

  마침내 ‘듄: 파트 2’가 지난 2월 28일 개봉했다. ‘듄: 파트 2’는 프랭크 허버트가 집필한 ‘듄’ 시리즈를 드니 빌뇌브가 영화화한 작품으로, 2021년 파트 1이 개봉한 후 3년 만이다. ‘듄’ 시리즈는 몰락한 가문의 후계자가 복수하는 복수극이면서, 예지된 운명을 타고난 인물이 택하게 된 삶을 다루는 여정이기도 하다.



왜, ‘듄’ 시리즈와 마키아벨리인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다. 이탈리아가 분열되고 외세의 침입으로 혼란스럽던 시기에 성장한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역량과 힘을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을 게 된다.


 마키아벨리의 유명한 저서인 『로마사 논고』와 『군주론』 은 그 메시지가 상반되고 충돌하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여전히 해석에 대한 갈등이 존재하지만, 정치와 도덕을 분리하고 종교를 국가 유지의 수단으로 바라보는 등 정치를 현실의 영역으로 들여왔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의미한 고전이기도 하다.


 ‘듄’ 시리즈를 이끄는 키워드는 ‘힘’이다. ‘듄’은 정치와 종교가 어떤 힘을 휘두를 수 있는지, 그리고 이것이 결합했을 때 얼마나 파괴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지난 2월 28일 개봉한 ‘듄: 파트 2’는 주인공 폴 아트레이데스(티모시 샬라메)가 프레멘의 열렬한 신봉을 받는 메시아 ‘리산 알 가입’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그렸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미래를 보는 폴의 한 마디에 열광하는 사람들 앞에서, 폴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력을 쥔 초인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프랭크 허버트 혹은 드니 빌뇌브의) ‘듄’ 시리즈가 국가를, 그리고 우주를 움직이는 권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작품 사이에는 중첩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무장한 예언자가 되다

 ‘듄’ 시리즈의 하나의 축이 되는 종교에서는 ‘예언’이 아주 중요한 요소로 기능한다. 예언이란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알거나 짐작해 말하는 것으로, 신의 뜻과 메시지를 대리하는 대리자의 언어를 통해 사람들 사이로 전파된다. 예언은 실제로 그 일이 현실이 될 때 그 힘이 극대화된다. 그러나 예언이 현실화되기까지는 시차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예언은 현실이 되기 전까지 그 힘이 미약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따라서 예언자는 쉽게 의심받고, 모욕당한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비판하는 여러 인물 가운데 눈에 띄는 이는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다. 사보나롤라는 이탈리아의 설교가이자 종교개혁가로서 부패한 교회와 정치를 비판했다. 그는 예언자적 설교를 하며 신정정치를 하다 끝내 시민의 지지를 잃고 화형 당해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다.


 마키아벨리는 사보나롤라가 ‘비무장 예언자’이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그는 예언자는 ‘무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을 설득하기는 쉬울지 몰라도 설득된 상태를 유지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그들이 무언가를 믿도록 할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폴이 퀴사츠 더락으로 각성하면서 ‘무장한 예언자’, 더 나아가 독재자나 학살자로 불릴 만한 행보를 보인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운명은 왜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듄’에는 베네 게세리트라는 집단이 다. 베네 게세리트는 여성이 주축이 되는 초능력자 집단으로, 훈련을 통해 다양한 능력을 기른다. 이들은 신체를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목소리를 변조할 수 있으며, 임신한 자식의 성별을 정하거나 상대의 거짓말을 간파하는 능력까지 지니고 있어 이러한 능력으로 여러 가문을 지배한다.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힘을 여성 집단에게 부여하고 이들을 마녀 집단으로 설정하는 것은 다소 여성비하적인 생각에 기반해 있는데, ‘여성이 마녀이고 남성을 조종한다’는 공식은 구시대적 여성관에 근간을 두기 때문이다. ‘듄’이 그리는 여성 집단은 이성적 사고가 아닌 계시를 믿고 이를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존재다.


 마키아벨리 역시 『군주론』에서 이러한 사고관을 드러낸다. 그는 역량이라는 뜻의 ‘비르투(virtu)’와 운명이라는 뜻의 ‘포르투나(fortuna)’를 설명하면서 군주는 변덕스러운 포르투나에 맞서기 위해 비르투를 발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운명은, 그리고 여성은 몹시 변덕스러워 어떨 때는 행운을 주지만 어떨 때는 불운을 주는 존재다.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다루기 까다로운 것이다.


 베네 게세리트라는 여성 집단이 계시와 운명을 믿는 존재로 그려지는 것은, 여성은 이성적이지 않다는 구시대적 사고와 운명을 곧 여신(여인)의 형태로 묘사하는 것의 연장에 가깝다.



나가면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둘러싼 여러 해석이 있다. 마키아벨리가 공화주의를 주장한 『로마사 논고』와는 충돌하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마키아벨리가 메디치가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쓴 것이라는 해석이 그중 하나다.

 

 또 다른 해석도 있다. 마키아벨리가 인민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그린 폭력적이고 폭압적인 군주는 진정으로 존경받는 군주의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해석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민중에게 이렇게 경고하는 것이다. “민중이 비르투를 잃는다면...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 이 해석을 떠올린다면 앞으로 폴이 맞이하게 될 결말은 몹시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다룬 ‘파괴적인 힘을 가진 군주몹시 두려운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비르투를 지닌 민중에 의해 실패할 가능성도 높다. 비록 폴의 본성은 독재자로서의 자신을 거부하는 것일지라도, 그 본성은 이제 큰 의미가 없다. 폴은 이미 군주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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