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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흑흑 Mar 22. 2024

2024년에 다시 읽는 ‘지구를 지켜라!’

 장준환 감독의 영화 ‘지구를 지켜라!’가 리메이크다. 송곳니, ‘더 랍스터’,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최근 국내 개봉한 ‘가여운 것들’까지. 기이하면서도 독특한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요르모스 란티고스가 감독을 맡는다. ‘지구를 지켜라!’는 2003년 개봉한 한국 영화인데, 20여 년이 지난 지금 읽었을 때도 의미가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지구를 지켜라!가 말하는 부조리

 병구(신하균)는 외계인으로 인해 지구가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믿는다. 병구는 외계인이라고 믿는 유제화학 사장 강만식(백윤식)을 납치해 안드로메다 왕자와 만나게 해 달라고 요구한다. 한편, 추 형사(이재용)는 강만식 납치 사건의 범인으로 병구를 지목하고 그를 추적해 온다.

 병구에게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를 안기는 곳이다. 강 사장을 비롯하여 병구가 납치, 고문, 살해한 이들은 병구 본인이나 가족, 주변인에게 상처를 입힌 이들이다. 이렇듯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준 존재를 지구를 위협하는 외계인으로 타자화하고 나와 다른 종족으로 분리함으로써, 병구는 분노와 슬픔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나에게 고통을 주는 저런 놈들은 인간이 아닐 거라는 믿음이다.


 병구의 정신 질환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 분노에서부터 기인한다(너무 화가 났거든요). 하지만 병구는 다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분노한 사람이지만 여전히 자신을 괴롭히는 무언가에 두려움을 느낀다. 강 사장은 병구를 겁쟁이라고 부른다(넌 아직도 내가 겁나지?). 겁쟁이라는 소리를 들은 병구의 눈은 흔들리고, 병구는 동요 없는 무자비함을 가장하려 애쓴다. 병구의 정신 질환은 병구가 정말로 미쳤기 때문이 아니라, 미쳐야 살 수 있기 때문에 미친 척이라도 하는 미친놈에 가깝다.



산업재해 문제는 여전하다

 “왜 날 내버려 두지 않는 거야?”
 “다 알 수 있겠지. 뻔한 얘기니까. 다 알면서 어디 있었는데? 내가 미쳐갈 때 어디 있었어? 니들이 더 나빠. 니들이 죽인 거야.”


 2024년에도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하는 죽음과 질병은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광산 사고로 장애인이 된 병구의 아버지, 유제화학에서 일하다 식물인간이 된 병구의 어머니, 병구의 연인도 산업 재해를 겪었다. ‘지구를 지켜라!’는, 외계인과 망상장애가 섞인 B급처럼 보이는 순간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끌고 온다. 병구가 시종일관 언급하는 외계인 이야기는 병구의 망상(물론 이후 이것이 실제였다는 것이 밝혀진다)’의 영역이라면, 병구가 밀린 어머니 병원비를 내기 위해 강 사장의 카드에서 400만 원을 인출해야 했던 것은 현실’의 영역이다. 이렇듯 지구를 지켜라!’는 망상(처럼 보이는 것)과 현실 사이를 줄타기한다.


 영화는 2003년 개봉했지만, 여전히 산업 재해로 고통받는 이들이 존재하며 이 고통을 산업 재해로 인정받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이들이 있다. 병구는 이것이 타인에게는 뻔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말하지만, 병구의 삶에서 이 내러티브는 뻔할 수 없다. 이 내러티브는 병구의 현재를 만든 고통이기 때문이다.


 병구는 강 사장에게 속아 벤젠을 어머니에게 먹일 만큼 순진하면서도 어머니를 살려야 한다는 강렬한 동기가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벌어진 일은 비극이다. 물론 강 사장이 병구를 속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벤젠은 정말 해독제가 맞지만, 병구가 늦어 어머니가 죽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비극은 마찬가지다. 비극은 어머니를 살리려는 병구의 간절한 열망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병구는 자신의 어머니가 외계인들의 실험 대상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왜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엄마가 실험 대상이냐고 묻는다. 외계인은 표본을 선정할 때 고통이 많은 사람을 선택한다고 대답다. 가장 고통받는 사람이 가장 잘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약자에게 고통을 주는, 고통을 줄 대상으로 약자를 선택하는 부조리함이다.
 



제 지구는 누가 지키지?

 후반 30분 동안 영화는 ‘설마 강 사장이 진짜 외계인인가?’ 하는 의문이 들게끔 흘러간다. 강 사장이 진짜 외계인인지, 혹은 병구의 망상에 장단을 맞춰 주는 것인지, 관객은 혼란스럽다. 분명 초반부에 강 사장이 이상한 언어를 내뱉는 것을 보았고, 강 사장이 자기 입으로 자기 자신을 외계인이라고 지칭하는 것을 들었는데도 말이다.


 혼란에 빠진 관객이 놓치게 되는 것은, 강 사장이 외계인이든 아니든 그 사실 자체는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병구가 겪은 부조리한 사건을 이해할 수 없는 것(외계)으로 해석하려는 감독의 의도다.


 그리고 영화는 이제 정말 외계로 이야기를 데려간다. 외계인은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행하는 폭력을 비판하며 인간을 자멸하게 만드는 자살 유전자가 인간에게 있다고 말한다(이 아름다운 행성이 너희들 때문에 죽어가고 있단 말이야!). 그리고 결국 외계인의 실험 대상이 모두 실패하면서 인간은 가망 없는 존재이고, 숙주부터 병들었기 때문에 고쳐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제 판단의 주체는 외계인이 다. 실은 영화 처음부터 그랬다. 이야기를 주도한다고 믿었던 병구의 내러티브 역시 외계인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구를 지켜라!똑바로 살지 않으면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나가면서

 ‘지구를 지켜라!’는 병구의 내러티브를 통해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과 산업화 시기, 자본이 저지른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병구가 겪은 사건은 시대적 맥락을 함께 해석할 때 더욱 복잡하면서도 분명해지는 이야기다. 얼핏 보면 B급 영화처럼 같지만 벌떼 장면, 병구의 과거 장면 등 영화에 스며들어 있는 서스펜스와 부조리는 ‘지구를 지켜라!’를 마음 편히 볼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지구를 지켜라!’는 상당히 한국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란티모스의 ‘지구를 지켜라!’는 이 내러티브를 어떤 층위의 이야기로 다룰 것인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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