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성성점등’으로 데뷔하여 장이모우 감독의 영화 ‘집으로 가는 길’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장쯔이. 그는 ‘와호장룡’으로 국제무대에 발을 넓힌 이후 홍콩을 대표하는 왕가위 감독과 ‘2046’, ‘일대종사’로 합을 맞추었으며, 최근에는 드라마 ‘상양부’ 제작 및 출연에 참여했다.여전히 활발하게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쌓아 나가는 장쯔이는 중국을 대표하는 배우 중 하나다.
이 글은 장쯔이의 여러 작품 중 ‘와호장룡’과 ‘일대종사’를 다룬다. 2000년, 장쯔이의 전성기를 만든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과 2013년, 제2의 전성기를 만들어 준 왕가위 감독의 ‘일대종사’에는 10여 년의 시차가 있지만비슷한 지점이 많다.
들어가면서
‘와호장룡’은 청나라 말기 무당파의 이모백(주윤발)은 자신의사부가 자객 ‘푸른 여우’에게목숨을 잃자 강호를 떠날 결심으로 청명검을 수련(양자경)에게 맡기면서 시작된다. 복면을 쓴 도둑이 청명검을 훔쳐 옥대인의 집으로 도망치자,수련은 옥대인의 집에 찾아간다. 그곳에서 수련은 옥대인의딸소룡(장쯔이)을 만난다. 수련은 푸른 여우가 소룡의 유모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소룡이 푸른 여우에게서 무공을 전수받아 청명검을 훔친 것을 알게 된다.
‘일대종사’는 1930년대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시기, 영춘권 고수인 엽문(양조위)과 팔괘장 고수 궁이(장쯔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궁이의 아버지 궁보삼은 궁가 64수의 후계자를 고민하던 중, 엽문을 만나 그에게 모든 명성을 물려준다. 한편 궁보삼은 궁보삼의 제자였던 마삼이 일본과 손을 잡은 것을 알게 되고 그를 문파에서 제명하자 마삼이 궁보삼을 살해하고, 궁이는 마삼에게 복수하고자 한다.
소룡과 궁이는 닮은 점 많은 여성들이다. 관습에 묶여 있지만 이를 따르지 않으려는 인물이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려는 여성이다. 두 인물의 공통된 서사의 줄기를 살펴보자.
혼인에 발이 묶인 여성들, 스스로 벗어나다
소룡과 궁이는 혼인 또는 집안이 정해 준 운명에 발이 묶인 여성들이다. 소룡은 정략결혼을 해야 하는 처지며, 궁이는 아버지의 말대로 ‘얌전히 살 것’과 ‘혼인이나 할 것’을 요구받는 여인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족쇄처럼 따라붙는혼인과 구속에서 스스로 벗어나려 한다.
소룡은 매일 밤 복면을 쓰는 인물이다. 소룡의 이러한 이중생활은 ‘얌전히 혼인날을 기다려야 할’ 여인에게 요구되는 행동은 아니다. 이는 늘 강호를 갈망해 온 소룡의 욕구를 해소하고자 하는 방법이며, 아이러니하게도 소룡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행위이기도 하다.
소룡은 자유롭게 방랑하는 소설 속 영웅의 삶과 사랑하는 사람을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수련을 부러워한다. 물론 소룡은 수련 역시 이모백과의 사랑에 있어서 진실된 선택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저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혼인의 굴레 속에서 혼인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원할 뿐이다.소룡은 혼인날 자신을 납치한 마적단 두목 소호(장첸)와 사랑에 빠지고 자유를 만끽한다. 청명검을 손에 넣고 자신을 ‘천하제일검’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끝내 들끓던 욕망을 잠재운 듯, 산 아래로 몸을 날리며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다.
궁이는 정혼을 하면 더 이상 궁가 사람으로 남을 수 없어 아버지의 복수를 할 수 없으므로 정혼을 포기한다. 궁이의 이 선택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며,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행위다.여기서 가문의 대의를 지키기 위해 개인적인 삶을 희생하는 궁이의 영웅적 면모가 드러난다. 궁이의 아버지는 궁이에게 “(마삼에게) 복수하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궁이는 결국 복수를 택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궁이를 옥죄는 것들은더욱 강해진다. 문파 남성들은 궁이를 둘러싸고, 궁이에게‘복수하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복수를 하면) 짐승이다’라고 말한다. 이들은 궁이에게 얌전히 살 것, 즉 혼인할 것을 요구한다.모든 건 다 하늘의 뜻이니 그저 순종하라는 말에 궁이는 이렇게 답한다.“내가 하늘의 뜻일지도 모르죠.”
영화의 진주인공으로 우뚝 서는 그녀들
소룡의 마지막 선택은 사랑이 아니다. 그토록 그를 사랑하는 소호를 내버려 둔 채, 소룡은 간절히 바라던 자유를 향해 몸을 던진다. 산에 얽힌 전설(“저 산에서 떨어지면 신이 소원을 들어준대.믿음만 있으면 되는 거야.”)을 믿은 것이다.
그동안 거센 파도가 치는 것처럼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했던 소룡은 이제 고요해졌다. 수련과 “어떤 선택을 하든 진실해지겠다”는 약속을 한 소룡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산에 빌었다. 소룡은 자신의 죄를 씻어낸 새로운 삶, 그 삶에서 자유롭게 선택하고 살고 싶다는 소원을 빌었을지도 모른다. “신나는 곳이면 어디든!” 가겠다고 말했던 소룡의 표정이 어둡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마음이 편해진 것 같다.
‘일대종사’의 엽문은 실존 인물로, 영춘권을 대중에게 알린 무술가다. 그야말로 영춘권의 일대종사인 엽문을 다룬 대중매체(‘엽문’ 시리즈)는 매우 많았다. 하지만 ‘일대종사’에서 엽문은 관찰자 겸 화자로 등장한다. 영화는가상인물인 궁이의 복수와 그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다.엽문의 이야기를 기대한 관객들은 이러한 전개에 실망했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꾸준히 영상화된 엽문의 서사보다 궁이의 서사가 더 흥미롭다.
궁이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단단한 심지 같은 인물이지만, 동시에 외로움과 슬픔을 느끼는 연약한 인간이기도 하다. 그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가문의 명예를 되찾아오겠다는 일념 하나로 모두가 반대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복수의 끝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고, 궁이에게 남은 것은 오직 외로움뿐이다.자신의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가문의 복수를 하고, 엽문과 동등한 위치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도 하고 보여 주기도 하는 이 특별한 인물에 마음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다.
나가면서
소룡과 궁이는 영화의 진주인공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관습에 저항하고, 어떤 것에도 순응하지 않으려는 굳센 의지를 가진 인물이다. 그리고 이 굳센 의지는 때로는 자신을 다치게 만들기도, 쓸쓸함과 고독을 안겨 주기도 한다. 소룡과 궁이는 모두 강인해 보이지만 늘 흔들리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장쯔이가 21살에‘와호장룡’의 소룡을 만나고 34살이 되어 ‘일대종사’의 궁이를 만난 건 축복이다. 이런 서사의 인물을 둘씩이나 만나는 기회는 그 어떤 배우에게도 흔치 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