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1945 그때 지금이 시작되었다
5개월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 프로그램을 찾아보게 된 것은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다. 개인적인 이유라 하면 이 시기, 즉 1945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이 시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보려 했었고 적지 않은 책을 읽었다. 1945년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새로운 국제질서가 만들어진 때였다. 우리나라로 한정해 보면 역시 오랜 독립운동 끝에 제국주의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했다. 세계적으로 보면 2차 대전의 종전과 함께 전승국인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질서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는 세계 질서에 편입되어 분단이 되었다. 1945년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해이다.
유럽은 연합군의 독일 진주와 히틀러의 자살로 전쟁이 끝났지만 아시아는 달랐다. 유럽의 전쟁이 지상군 중심이었다면 아시아 태평양의 전쟁은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었다. 항공모함이 동원되고 전투기가 하늘에서 전투를 벌였다. 우리로서는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하고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패전이 코앞에 다가왔지만 일본은 끝까지 패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물론 일본 내부에서도 연합군 측과 협상을 하자는 세력이 있었지만 군부 강경파에 밀려 힘을 쓰지 못했다.
독일과 일본은 전후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 독일은 연합국에 의해 분단국가가 되었고 철의 공산권과 맞서는 최전선이 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천황제도 유지하고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 따라 소련과 공산화된 중국에 맞서 태평양의 방어선이 되었다. 일본의 패망은 우리의 운명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우리는 그 결과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시기를 공부하며 여러 책을 많이 읽었지만 인상 깊게 본 책은 중의 하나는 1945년을 서기 0년과 같이 ‘Year Zero’, 즉 현대의 기점이라고 해석하는 책인데 책의 제목이 <Year Zero: A History of 1945>(저자: Ian Buruma)다.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출간됐는데 한글 제목은 <0년:현대의 탄생, 1945년의 세계사>(2016년 출간)이다. 책을 읽은 것이 10년이 되었느니 이제는 책의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이 책의 서평을 보시고 싶은 분들은 다음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란다.
https://weekly.donga.com/culture/article/all/11/525563/1
방송사에서는 끝자리가 ‘0’으로 끝나거나 ‘5’로 끝나는 해는 대형 특집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경향이 있다. 8.15 해방이 1945년이고 한국전쟁이 1950년이니 80주년, 85주년 같은 이름을 붙여 기획하기 때문이다. KBS의 <월드 1945-그 때 지금이 시작되었다>역시 광복 80주년 기획으로 제작되었고 방송도 8월에 맞춰 방송되었다.
1부 <욕망의 검은 피, 석유> / 2025년 8월 10일(일) 21:30 KBS1TV
2부 <죽음의 여정, 핵> / 2025년 8월 17일(일) 21:30 KBS1TV
3부 <왕관의 무게, 달러> / 2025년 8월 24일(일) 21:30 KBS1TV
1945년을 타이틀로 내세운 이 프로그램은 3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다큐멘터리다. 3편의 에피소드는 ‘석유’, ‘핵’, ‘달러’가 주제어로 제작되었다. 물론 다른 주제어도 뽑으려면 많이 있겠지만 이 세 가지는 20세기를 규정짓는 중요한 키워드로 생각된다. KBS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기획 의도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전쟁을 움직이게 하는 검은 피, 석유.
세계의 구조를 뒤흔든 죽음의 여정, 핵.
경제를 지배할 왕관의 무게, 달러.
세계의 패권을 좌우할 세 가지 키워드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1945년, 그 해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1945년을 석유, 핵, 달러로 해석해서 본다...
내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공부하고 기획했던 내용과는 달라 어떻게 만들었나 궁금했다.
오늘은 1부인 ‘욕망의 검은 피, 석유’에 대한 이야기다.
다시 보기 링크 : https://program.kbs.co.kr/1tv/culture/kbsworld1945/pc/index.html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아쉬움이 전체를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프로그램 전체의 타이틀이 ‘그때 지금이 시작되었다’이어서 1부는 석유와 관련해 1945년에 무엇인가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고 그 결과 지금의 모습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랐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석유를 중심으로 보는 2차 대전사의 느낌이었다. 히스토리 채널 같은 데에서 볼 수 있는 흥미 중심의 아카이브 다큐멘터리의 느낌 같았다.
물론 ‘석유’는 전쟁에 있어 중요한 모티브였다. 히틀러가 주장하던 아리안족의 레벤스라움(Lebensraum)이든 제국주의 일본이 5족 협화(五族協和)를 내세우며 주장했던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이든 세계의 패권을 잡으려면 석유 자원의 독점이 필수적이고 탱크, 전투기, 항공모함을 비롯한 함대가 동원된 전쟁을 수행하려면 엄청난 양의 석유가 필요했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과 일본은 산유국이 아니기 때문에 수입이 막히면 점령으로 석유를 확보해야 했다. 이 다큐멘터리를 그러한 점을 잘 짚어내기는 했다. 독일은 소련을 침공하면서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동시에 소련의 최대 석유 생산지인 아제르바이잔으로도 진격했다. 일본은 진주만 공습과 동시에 동남아로 진격해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을 점령했는데 이는 원유 주요 수입국인 미국이 일본에 대한 수출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런 상황을 잘 따라간다. 그래서 석유로 보는 2차 대전사의 느낌이 든다.
나의 시선에는 불편한 지점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우선 용어의 혼동도 눈에 띈다. 미국의 ‘동맹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적절하지 않은 용어다. 2차 대전은 연합국과 동맹국의 대결이다. 동맹국(Axis Powers)은 추축국이라고도 불리며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당시의 군국주의 파시즘 국가를 말한다. 연합국(Allies)은 미국과 영국, 소련, 중국 등의 국가를 말한다. 하지만 내레이션을 보면 미국이 유럽의 동맹국들을 막후에서 지원하고 있었다는 등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연합국과 동맹국이 대결하는 구도인 2차 대전에서는 주의해야 할 단어라고 생각한다. 사실 막후(幕後)라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다. 막후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장막의 뒤라는 의미로 미국의 유럽 지원은 막후가 아니다. 파병을 하지 않았을 뿐 드러나지 않게 뒤에서 지원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의 내용은 아쉬움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의회에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 결의해 달라는 요청하는 자료 영상 뒤에 루스벨트 연구소 연구원의 인터뷰가 있다. 미국과 일본이 협상을 하고 있었지만 일본이 협상하는 척하면서 전쟁을 준비해 루스벨트가 분노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인터뷰에 갑작스레 언급된 협상이 어떤 협상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다음은 동남아시아로 전쟁의 영역을 확대한 일본이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에서 석유를 확보하는 내용이다. 이 부분의 시작은 브루나이에 대한 소개로 시작한다. 그런데 왜 브루나이가 들어갔는지 잘 이해가 안 된다. 브루나이의 술탄이 7천대의 고급 외제차를 갖고 있다는 것, 거리에 오토바이가 없다는 내레이션과 기름값이 콜라값보다 싸다는 인터뷰는 혼란을 가중시킨다. 일본이 전선을 확장한 것과 브루나이와의 연관성은 설명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아시아의 상황을 주시하던 루스벨트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석유 수출을 금지했다는 설명과 함께 미국의 석유에 의존하던 일본이 미국이 석유 수출을 금지하자 이를 빌미로 동남아시아로 전선을 확대한 것이 전쟁의 원인이라고 언급한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협상’이 미국의 대일본 석유 수출 금지 조치를 해제하려는 협상이라는 이야기는 빠져 있다. 그래서 앞의 인터뷰가 자리를 제대로 못 잡은 느낌이다.
‘일본을 견제’한다는 표현도 적절한지 의문이다.
2차 대전의 상황을 넓게 본다면...
독일의 침공으로 아시아에 식민지를 갖고 있던 유럽의 국가들은 이중고를 겪는다. 본토는 독일이 공격하고 아시아의 식민지는 일본이 공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까지 전쟁을 확대할 여력이 없는 유럽 국가들, 특히 아시아에 많은 식민지를 갖고 있던 영국이 아시아에서 미국의 역할을 요구했다. 그것이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 금지 조치다. 이러한 맥락에 대한 언급 없이 ‘일본을 견제’ 하기 위해 석유 수출을 금지했다고 하는 것은 뭔가 부족함을 느낄 수 밖에는 설명이다.
미국의 배급제 시행 역시 프로그램의 집중력을 흩트려 놓는 요소라는 생각이다. 캘리포니아 영상(현재 모습)을 사용하면서 캘리포니아가 아니라 텍사스에서 원유를 생산해 내면서 세계 최대의 산유국이 되기 시작했다는 내레이션이 이어져 나온다. 캘리포니아는 왜 간 거지?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든다. 석유 생산을 늘리기는 했지만 국내 소비를 줄이기 위해 배급제를 하고 대신 전쟁에 지원하는 내용인데 그리 중요한 내용인가 의문이었다.
그리고 내 생각에 제일 중요한 영미 석유 협약(Anglo-American Petroleum Agreement)은 끝 무렵에 잠깐 나온다. 더 많은 부분을 할애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영미 석유 협약은 전쟁 종료 한 해 전인 1944년 8월에 영국과 미국이 전후 중동의 석유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대해 합의한 것을 말한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영국이 이란을,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를,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석유 이권은 공유하는 원칙에 합의하려고 했다. 중동에서 이미 기득권을 갖고 있던 영국은 기존 중동 내 이권을 보장받고, 중동에의 새로이 발을 디디는 미국은 신규로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이권을 보장받는 것이다. 또한 International Petroleum Commission을 설치해 석유 생산량을 조절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으려는 석유업계의 반대와 반독점 문제를 제기한 의회의 반대에 부딪혀 루스벨트와 처칠의 합의는 실현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의 시작점은 여기가 아니었을까?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지하자원인 석유에 대한 통제권을 미국과 영국이 나누기로 한 합의가 갖는 의미, 그리고 2025년 현재의 중동의 국제정치학적 모습들을 살펴보는 것이 ‘그때 지금이 만들어졌다’는 프로그램의 타이틀에 부합하는 것은 아닐까? 1945년 종전 이후 중동의 국제 질서가 이때의 설계로 만들어졌고, 미-영 양국의 이권과 자신의 지역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이슬람 세력 간의 갈등이 현재의 중동을 만들었다는 것을 추적해 나갔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이런 질문들이 계속 머리에 떠 올랐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는 이 내용은 그리 깊고 길게 다루지 않고 끝을 맺는다. 2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미국이 배급제를 해제했다는 내레이션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