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12월이면 나는 백운대에 오른다.
그냥 오르는 건 아니고, ‘아듀 가는 해’ ‘웰컴 오는 해’라는 토퍼를 가져간다.
정상에서 그것을 들고 이리저리 사진을 찍어본다. 별것 아닌 종이 장식인데, 마음 정리가 잘 된다.
한 해를 내려놓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먼저 맞이하는 기분.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몇 해째 이어온 나만의 의식이다.
2025년 12월 1일.
그날도 어김없이 백운대에 올랐다. 날씨는 맑았고, 시야는 멀리까지 트여 있었다.
사진 몇 장 남기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올해도 이만하면 잘 버텼다 싶은 마음. 그날 산행은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이틀 뒤, 변덕이 생겼다.
TV 뉴스에 눈 소식이 들어있는 것이다.
며칠만 늦게 갔으면 백운대에 눈이 쌓인 모습을 보고 왔을 텐데.
이미 다녀왔으면서도, 그 장면을 놓치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더 가볼까?
아이젠을 꺼내 손질하며, 작년 한 해 나를 보호해줬던 고마움에 꼬-옥 안아줬다.
두 번째 산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런데 막상 올라가 보니 이상했다. 눈이 없다. 그래도 정상엔 눈이 많겠지. 수도권에선 제일 높은 동네 아닌가.
백운대에 올랐는데도 내가 사는 동네보다 덜 왔다. 이럴 수가. 높은 산이면 더 쌓여 있어야 할 텐데, 오히려 반대였다. 다른 등산객들 표정도 비슷했다.
누군가는 “여긴 왜 이래요?” 하고 중얼거린다. 눈 보겠다고 또 올라온 이 상황이, 조금 우스웠다. 허탕을 친 기분, 가볍게 놀림당한 느낌도 들었다.
터덜터덜 집으로 왔더니, 집에서 아내가 말했다.
“나도 높은 산 한번 가보고 싶어요.”
평소에는 걷기만 하던 사람이 웬일이지?
어디로 갈까, 멀지 않으면서도 산다운 맛을 보여줄 곳. 역시 백운대보다 나은 곳이 없다.
세 번째 산행은 그렇게 둘이 함께였다.
이번에는 승용차를 가져갔다. 전철로 오면 한 시간 남짓인데, 차로는 더 걸렸다.
하산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두 시간이 넘게 걸려렸다.
피곤한 몸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으니 생각이 단순해진다.
"다음엔 꼭 전철로 다닙시다."
정상으로 오르는 마지막 구간. 그곳은 누구나 쇠밧줄을 당기며 올라야 한다.
약 200미터쯤 철제 난간도 만나고, 철계단도 올라야 한다. 겨울바람에 식은 쇠는 손에 닿자마자 차갑다.
장갑이 없으면 금세 손끝이 얼얼해진다.
그래서 겨울 철엔 꼭 장갑을 가져가야 한다. 정상 직전에 뒤를 돌아보면 인수봉이 지척에 보인다.
자일 없으면 오를 수 없기에, 겨울철엔 쓸쓸해 보이기도 하는 산.
아내가 걸음을 멈췄다. 인수봉을 내려다보더니, 얼굴이 환해졌다.
“와… 여기 정말 높네요.”
그 말에는 놀람과 만족이 함께 담겨 있었다. 잠시 뒤, 나를 보며 말했다.
“조심하세요.”
그 한마디가 오래 남았다. 하산 길에 젊은이 둘이 맨손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쇠밧줄을 잡았다 놓았다 하며 손을 호호 불어 댄다.
“장갑 없어요?”
아내의 물음에 그들은 멋쩍게 웃기만 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우리는 내려가니까, 이거라도 끼고 올라가요.”
그들은 고맙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장갑을 끼는 손들이 바빴지만,
맨손이 된 우리의 발걸음도 바빴다.
손등을 스치는 바람이 차가웠지만, 마음은 따뜻해졌다.
백운대는 편한 산이 아니다.
가파르고, 바람이 세고, 마지막은 늘 긴장감이 돈다. 그런데 그 긴장 속에서 오는 만족이 있다.
안전한 길만 걸어서는 느낄 수 없는 그런 기쁨이다. 많은 산들의 정상 기분들 중 백운대의 그것은 독특하다.
그래서일까. 열흘 사이 세 번이나 올랐으면서도, 곧 또 오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