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뒤편의 어둠 속에 초로(初老)의 한 남자가 서 있다.
희끗희끗한 머리와 구레나룻 수염, 마음을 아리게 하는 야윈 얼굴,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감회에 젖은
깊은 눈빛, 긴장한 듯 굳게 다문 입. 마이크를 쥔 손이 가볍게 떨려온다. 관객들은 기대와 설렘이 가득한
얼굴로 남자가 어둠 속에서 나오기만을 숨죽여 기다린다. 마침내, 무대의 막이 오르고 남자는 천천히
어둠을 벗어나 관객들을 향해 무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온다. 우레와 같이 쏟아지는 박수와 함성..
그리고, 관객들이 한 목소리로 연호하는 그 이름!
왕이 다시 돌아왔다.
감당하기 힘든 처절한 고통과 슬픔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적막한 숲의 어둠 속에 자신을 가둔 채 은둔하던 상처투성이 호랑이. 그가 7년의 침묵을 깨고 적막한 숲의 어둠을 벗어나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절망과 아픔을 딛고 더욱 깊어진 울림과 빛나는 모습으로 돌아온 왕의 귀환. 그는, 임재범이다.
추석 무렵 임재범 특집으로 방송된 ‘불후의 명곡’에서 오프닝 때 어둠 속에서 무대로 천천히 걸어 나오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져 왔다. 7년 만에 다시 선 무대에 긴장이 되었는지 떨리는 눈빛과
만감이 교차하는 감회 어린 표정으로 관객석을 바라보며 ‘비상’을 부르는 그는 힘을 빼고 부르는 듯했지만
여전히 묵직한 울림과 감동을 안겨주었다. ‘비상’을 들으며 순간 울컥하여 눈물이 흘렀다.
추석날 방송된 2부 오프닝에서 부른 신곡 ‘아버지 사진’은 먹먹하면서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픈 느낌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제주어로 비유하자면 '을큰함'이랄까. '을큰하다'라는 제주어의 사전적인 뜻은 '마음속에 충격이 너무 커서 억울하고 서운한 게 많이 있다.'이다. 형언할 길 없이 서럽고 원통하고 아픈 마음을 표현할 때 주로 쓰이는 말이라 할 수 있는데, '아버지 사진'의 가사 중에 "할퀴던 순간도 속으론 아파했을 그 마음"을 예를 들면 "곡주어난 고리도 소곱인 을큰해실 그 모음" 과 같이 쓸수 있다. 임재범의 '아버지 사진' 무대는
노래를 듣는 내내 바로 그런 '을큰함'이 느껴지는 무대였다.
엔딩 무대에서 후배 가수들과 함께 부른 타이틀 신곡 ‘위로’는 정말 가사 하나하나가 위로를 주는 듯 가슴속 깊이 와닿았다. 임재범과 후배 가수들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지치고 힘든 사람들의 마음을 감싸 안듯 위안을 주었던 무대였다. 나 또한 '위로'의 무대를 보면서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사진 전체 출처: Daum 뉴스- KBS불후의 명곡
국내의 많고 많은 가수 중에서 유일하게 내 가슴을 설레게 하고 심장을 뛰게 하는 영원한 내 가수 임재범.
지난 2016년 콘서트 이후 활동을 중단하여 소식을 알 수 없었던 그는 2017년 부인상과 2020년 부친상으로 인한 두 번의 부고 기사 외에는 흔한 목격담조차 없어 근황을 알 길이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부친을 연이어 떠나보낸 후 홀로 딸을 키우며 그 헤아릴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견디고 감내하는 삶의 깊이를 어찌 감히
짐작할 수 있을까. 그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팬들은 그가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가족을 잃은 아픔과 상처로 건강이 상하지는 않을까 염려하며 부디 잘 이겨내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내 마음 또한 그러했다. 암 투병을 하는 동안 병원에서 치료와 검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항상 이어폰을 귀에 꽂고 그의 노래를 듣곤 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그의 목소리가 병마에 지쳐 힘들고 불안한 마음을 위로해 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노래를 위안 삼아 듣고 또 들으며 힘든 시간을 견디고 버틸 수 있었다. 나 또한 팬의 마음으로 그가 무사히 아픈 시간들을 잘 견뎌내고 예전의 '카리스마 넘치는 호랑이의 눈빛'을 뿜어내며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런 팬들의 마음이 전해진 것이었을까. 마침내, 7년 만에 그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지난여름, 기사를 통해 그의 복귀 소식을 접했을 때 너무 뜻밖이라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11년 전 MBC‘나는 가수다’에서 처음 그를 봤을 때처럼 설레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7집 신곡 ‘위로’의
뮤직비디오 영상을 보면서 가슴을 파고드는 그의 생생한 현재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안쓰러울 정도로 야위고 머리도 희끗해졌지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와 독보적인 음색, 예전에 비해 한 결
부드러워졌지만 매력적이고 멋진 '호랑이의 눈빛'은 여전했다. 세월의 깊이만큼 더욱 깊어진 감성과 담백
하면서도 한층 더 풍성해지고 따뜻한 목소리로 전하는 그의 노래들이 내 마음을 적셨다.
자신 또한 감당하기 힘든 상흔을 품어 안고 견디며 노래로 우리에게 위로와 감동을 주는 그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이와 성별, 국적에 상관없이 노래와 목소리에 감동하고 그 매력에 빠져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살아있는 전설, 임재범 그 자신이야말로 '위로'의 가사처럼 너무도 '소중한 사람'이며 눈부시게 ‘빛나는 사람’이리라.
ㅡ202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