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는 직장에서는 승진 개념이 두드러지지 않기 때문에 주로 사번을 기준으로 나누어서 같은 사번 끼리는 대우도 거의 비슷하다. 같은 연도에 입사한 이 사번을 동기라고 한다. 더 세밀하게 말하면 같은 달에 입사했을 때 달동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직종에서 우리 직종에서는 ‘동기사랑 나라사랑’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꽤 많다.
나는 이것에 대해서 동기사랑에 대해서 별로 의미 없다고 생각해 왔다. ‘같은 학교에서 오래 보고 지낸 것도 아니고, 고작 사번 하나 같은 게 얼마나 의지가 될까’했는데, 신입사원의 쓰디쓴 1년을 함께해서인지 동기에게 더 의지할 점도 많고 오랜만에 만나면 조금 더 반갑긴 했다.
직장 분위기가 어렵다 보니까 선임에게 혼났을 때, 실수를 했을 때 등 기분이 안 좋을 때 퇴사방지를 위해 패스트푸드점으로 불러서 개인면담도 하고, 일이 바쁠 때 지나가면서 표정을 한번 구기고 지나가기도 하고, 사내 메신저로 칭얼거릴 때도 있었다. “막내잡”이라고 부르는 막내들의 전임 업무를 할 때도 미루지 않고 서로 자기가 하겠다고 하거나,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 날에는 수월한 쪽으로 파트를 바꿔주기도 했다.
업무 특성상 균등하게 일을 맡아서 하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바쁘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제일 먼저 나서주는 사람이 동기일 때가 많았다. 내가 부서를 이동하면서 동기와 소속은 달라지게 되었다. 부서를 옮기기 전 “우리 없는데 가서 이빨 8개 이상 보이면서 웃고 다니지 마라.”라고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정작 문하나만 열면 동기들이 바로 보이기 때문에 가까이에서 지내고 있다. 모든 것이 낯설 때 작게나마 마음 둘 곳이라고 생각했다.
부서를 옮기면서 동기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때도 생겼는데, 같은 긴급한 정도의 연락이 왔을 때 동기연락을 우선적으로 받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으니 동기에게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줄 수도 있었다. 역으로 내가 할 일이 많을 때 동기들이 이전 부서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명확히 선을 그어주어 일하기 훨씬 편하게 해주기도 했다. 팔은 역시 안으로 굽는다.
밥을 못 먹는 일이 생기면 주머니에 몰래 먹을 걸 넣어주기도 하고, 용건도 없으면서 “00아 살만하냐?”라고 연락이 오면 괜히 반갑다. 옆에 서서 말하는 척하면서 3초 동안 졸 때 모른척해주기도 하고, 선임에게 혼나고 있을 때 서로 대신 해결해 줄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이럴 때 엄청 뿌듯하다.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자면, 직장에서 쓰는 약어가 하나 있는데 예를 들어 “R/O”라는 단어가 있다고 하자. 이것은 Rule out(확정되지 않은 가진단)이라고 공인된 약어이지만, 직장에서는 Right organ이라고 하는 경우 선임이 알려주지 않는 이상 아무리 인터넷에 검색해도 안 나온다.
나 역시 그걸 질문했던 때가 있었고 뜻을 모른다고 오히려 역으로 꾸중을 들었었다. 그런데 동기가 나에게 “R/O”를 몰라서 쓴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화가 났다. 이 친구도 분명 검색했을 텐데 같은 직종끼리 이래야 하나 싶어서다. 그래서 바로 뜻을 알려주고 더불어 아무리 찾아도 안 나올 거라고 덧붙였다. 다음날 이 친구가 용어 뜻을 몰라 대답을 못한 일이 인계가 넘어가서 다른 사람이 또 이 친구에게 물어봤고, 뜻을 알아서 무사히 넘어갔다고 했다. 이 용어가 우리 부서와 관련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단어 뜻하나 알려주는 것은 정말 작은 일이고, 더 아찔할 때가 훨씬 많다. 이런 일들을 함께 겪다 보니 정도 더 빨리 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이 아찔함을 잘 견디고 동기들이 누락 없이 같이 커서 든든한 중간 연차가 되었을 때 딱 지금처럼만 서로 든든했으면 좋겠다. 다음에 사석에서 만나면 얼굴도장 한번 쾅 찍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