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 정장, 사투리, 그리고 당신
여보 안녕.
일요일 아침이야. 아침이라 하기엔 15분 후면 정오인 많이 늦은 아침.
정신은 일찍 들었는데 아무 계획이 없어 최대한 눈을 감고 자는 척하다가 그것도 지겨워졌어.
오늘은 뭘 하며 이 빈 시간들을 채워야 할까 하다가 일단 창문을 열었는데 날이 너무 좋더라.
상실을 겪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날씨가 이렇게 좋은 날엔 왠지 조금 슬퍼져.
여보가 내 곁에 있을 땐 집돌이인 당신에게 ‘사람이 해를 봐야 한다’고 단골 멘트를 읊어대며 어떻게든 외출하려고 애를 썼었는데.
지금은 멍하게 창문 밖을 바라보기만 할 뿐 집 안에 머물며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게 일상이 됐어.
그래도 오늘은 용기를 내서 책과 아이패드를 챙겨 집 근처 카페 구석에 자리를 잡았어.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카페가 북적이더라.
테이블 간격이 좁아서 의도치 않게 옆 테이블의 대화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
처음엔 연인인 듯 보였던 그들은 오늘 처음 만나 소개팅하는 사이 같더라.
역 근처 맛집에 대한 이야기, 회사생활에 대한 이야기…
여자는 꽤 관심이 있어 보이는데 남자는 왠지 시큰둥해 보여.
우리 첫 소개팅 날, 여보는 정장을 입고 주선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어.
선보는 자리도 아니고 소개팅 자리에 정장을 입고 나타난 당신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그 패션센스조차 사랑하게 될지 그땐 몰랐어.
얘기를 나누다 보니 조금씩 새어 나오는 당신의 사투리.
초등학교 때 서울로 전학 와 쭉 서울에서 살던 나.
그런 내 고향은 부산인데 왜 뜬금없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당신에게서 고향에 온 기분을 느꼈던 걸까….
이 사람과 함께라면 내 영혼이 좀 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살면서 제대로 풀어내지 못해 켜켜이 쌓이기만 한, 그래서 눈덩이처럼 불어난
내 감정의 짐들을 여보 곁이라면, 좀 풀어놓고 쉴 수 있을 거 같았어.
여보도 같은 생각을 했던 걸까?
내 무엇이 좋아서 헤어지면서 또 볼 수 있겠냐며 붉은 끼가 얼굴을 넘어 귀까지 그을리면서 나에게 물었을까…
그때 ‘아니요. 죄송하지만 우린 잘 안 맞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면 지금의 나는 좀 덜 아플까..
아니. 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여전히 당신의 붉은 얼굴과 사투리, 그 목소리, 그 투박한 손,
떨리는 눈…그 눈 속에 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했을 거야.
그렇게 세네 번 더 만나고 당신이 내게 말했어.
‘내가 담배를 끊으려는데, 그걸 끊으려면 니가 있어야 할거 같은데.. 도와줄래?’
‘담배를 끊으면 그다음엔…?‘ ’그럼 또 끊을 걸 찾아봐야지 ‘
준비한 멘트 같았지만, 꽤 괜찮은 고백 같아서 그것도 마음에 들었어.
그냥 당신이 뭘 해도 좋았나 봐. 그런 달콤한 순간들은 오래가지 못한다고들 하는데, 난 그게 10년을 가더라.
내 첫 남자친구… 이면서 그렇게 당신은 내 남편이 됐어.
당신과 함께한 모든 게 난 다 처음이었어.
첫 불꽃놀이. 첫 63 빌딩에서의 근사한 식사. 첫 낚시..
그리고 첫 이별이자 사별.
이별을 겪어보지도 못한 나에게 찾아온 사별.
오빠도 알다시피 나는 두부멘탈이라, 이별도 감당하기가 벅찼을 텐데…
사별은 도대체가 어떻게 이겨내는 건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울다가 눈이 퉁퉁 부어 늘 회사엔 눈이 부은 채로 출근하는데, 지금 부서 사람들은 내 눈이 원래 그렇게 생긴 줄 아는 거 같아.
사람들에게 내 얄팍한 눈을 보여줄 날이 올까…
여보. 그곳에서 맘이 편치 않겠지만, 나는 아직도 여보가 너무 많이 보고 싶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완전한 타인을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게, 그리고 그 사람이 연기처럼 사라졌다는 게 난 아직까지도 받아들이기 힘들어.
여보 장례식이 끝나고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와 주차장에서 미친 사람처럼
오빠 어딨어? 장난하지 말고 빨리 나와..라고 말하고 나서는 그대로 주저앉아 울었던 기억이 나.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는데 나는 아직도 그날과 많이 다르지 않아.
이제 곧 2주년이야.
그날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괜찮아져 있을까..
시간의 힘이라는 게 있대. 그것에 나를 맡겨 보는 것 밖엔 아직 다른 방법은 모르겠어.
씩씩하게 잘 지내겠다고 했는데 아직 그 약속을 못 지키고 있어서 미안해.
아무래도 시간이 더 필요하려나 봐. 좀 더 지켜봐 줘..
또 편지 쓸게
자두와 할머니에게 안부 전해줘.
사랑해.
2025년 5월 17일 당신 아내 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