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보다 무거웠던 한 문장, 장부출가생불환
충청도는 독립운동의 고장으로 자주 불립니다.
3·1 만세운동의 유관순 열사, 민족시인 만해 한용운, 청산리 대첩의 김좌진 장군.
이름만 들어도 한 시대가 따라옵니다.
그런데 큰 이름들은 늘 조금 멀게 느껴집니다.
교과서에서 먼저 만나고, 기념일마다 다시 불리고, 연설문 속에서 반복됩니다.
익숙한 문장이지만, 일상의 풍경과는 쉽게 이어지지 않습니다.
독립운동의 고장.
그 문장이 품고 있는 공기를 직접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산으로 향했습니다.
평온한 들판과 낮은 산들이 이어지는 곳, 윤봉길 의사의 고향.
윤봉길 의사 기념관과 충의사가 자리한 도시입니다.
도착했을 때, 예상보다 조용했습니다.
관광지의 분주함보다는, 일상에 가까운 공기.
그 점이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저는 이런 장소에 오면 곧장 현장으로 가지 않습니다.
먼저 기념관이나 박물관 같은 장소에 들어가 봅니다.
감정이 오래 남으려면, 그 사람의 시간을 잠시 따라가 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시관 내부는 밝지도, 어둡지도 않았습니다.
조용한 조명 아래 사진과 기록들이 차분히 놓여 있었습니다.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문장이 있었습니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집을 나서면 뜻을 이루기 전까지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한문 일곱 글자가 벽에 또렷하게 걸려 있었습니다. 잠시 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지나치게 비장하고 어떻게 보면 극단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는 선택의 언어였을지도 모릅니다.
결의가 다짐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던 시간.
돌아올 가능성을 계산하지 않는 선택.
전시는 과장되지 않았습니다.
농촌계몽운동을 하던 청년의 모습에서 시작해 상하이 의거로 이어지는 흐름이, 영웅담보다는 한 사람의 선택에 가깝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농촌에서 문맹 퇴치와 근대적 농업 교육을 고민하던 기록들은,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의거’ 이전의 시간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총과 폭탄을 들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고향에서 변화를 고민하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무겁게 남았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일본은 일왕 생일과 상하이 사변 전승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고 있었습니다.
군악대가 연주를 하고, 군인과 외국 인사들이 단상 주변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거사 전날, 그는 김구 선생과 마지막 식사를 하며 서로의 회중시계를 바꾸었다고 전해집니다.
“제 시계는 앞으로 몇 시간밖에 쓸 일이 없으니 바꾸어 주십시오.”
새 시계를 건네고 낡은 시계를 품에 넣었다는 이야기.
그 장면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대단한 연출도, 눈물의 이별도 없이
아마도 담담했을 그 식탁.
시계는 시간을 재는 물건이지만, 그날만큼은 남은 시간을 스스로 인정하는 표시였는지도 모릅니다.
행사장 단상 가까이 다가간 그는 폭탄을 투척했고, 곧 체포되었습니다.
폭발은 순간이었지만, 그 선택은 오랜 고민 끝에 내려졌을 것입니다.
폭탄 하나로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취조 과정에서 남긴 말이 전해집니다.
“이번 사건이 당장 직접 효과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만약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강국피폐(强國疲弊)의 시기가 도래하면 그때야말로 조선은 독립하고야 말 것이다. 우리들 독립운동자는 국가성쇠의 순환을 앞당기는 것으로써 그 역할로 삼는다.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세계로 하여금 조선의 존재를 알게 하는 데 있다.”
냉정한 문장입니다. 감정에 호소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흐름을 계산하고 있습니다.
이후 그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오사카를 거쳐 가나자와로 이감됩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
1932년 12월 19일, 스물네 살. 가나자와에서 사형은 집행되었고 윤봉길 의사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짧고 담담한 대답이었습니다. 그 문장은 크게 울리지 않지만, 이상하게 오래 남습니다.
일본은 그를 화장했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가나자와 노다산 인근에 암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에 묻어 흔적을 지우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광복 이후 1946년, 재일 동포와 정부 인사들의 노력으로 유해가 발굴되어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지우려 했던 이름이 다시 자리로 돌아오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시간은 느렸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그는 서울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산에는 여전히 출발의 시간이 남아 있는 듯했습니다.
이곳에서 한 청년이 처음 결심을 했던 시간.
기념관을 나와 충의사로 향하는 길은 유난히 조용했습니다.
영정 앞에서 분향을 하고 잠시 고개를 숙였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습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영정 속 얼굴은 놀라울 만큼 젊었습니다.
스물네 살.
그 나이를 떠올리니, 결의라는 단어가 조금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거대한 사명이 아니라, 한 개인의 선택.
밖으로 나오니 햇빛도 바람도 그대로였습니다.
풍경은 변하지 않았지만, 제 안쪽이 조금 조용해져 있었습니다.
혹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결국 독립은 독립운동가들의 노력보단 국제정세와 전쟁의 흐름 덕분 아니었나.”
역사적 흐름으로 본다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늘 여러 힘이 얽혀 움직입니다.
다만 위의 진술에서 드러나듯 그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당장 독립은 어렵다는 것을.
그럼에도 행동했습니다.
조선의 존재를 세계에 남기기 위해.
독립운동은 즉각적인 결과로만 설명되기 어려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나라가 없던 시간에도 “우리는 있다"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산을 떠나며 다시 그 문장을 떠올렸습니다.
장부출가생불환.
그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윤봉길이라는 이름은 지워지지 않았고, 조국은 마침내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산의 공기 속에는, 누군가가 결의라는 단어를 실제로 살아냈던 시간이 아직도 조용히 남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