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렀다.
그들은 오래, 오래 불행하게 살았다.
낭만적이었던 동화는 어느새 잔혹동화로 장르를 바꾸었다. 백마 탄 왕자는 사라지고, 눈앞에 남은 것은 역대급 빌런이었다. 그는 그 누구보다 악랄하게 해인을 짓밟고, 괴롭혔다.
현실은 잔인했다.
겉으로는 화려한 무대처럼 번쩍였다. 사진 속 두 사람은 언제나 웃고 있었고, 지인들 앞에서는 다정한 신혼부부였다.
그러나 커튼 뒤 무대 뒤편에는, 차갑고 눅눅한 공기가 가득했다. 그 공기 속에서 해인은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해인은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웃었다. 얼굴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가면서도,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는 잘 살고 있어요.
그 말은 늘 목구멍에서 가시처럼 걸렸고, 삼킬 때마다 속이 까끌까끌 긁히는 듯했다. SNS로 행복을 과시하며 위선을 떨었다.
해인은 동화에서 스릴러로 장르가 변했다고 감히 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불행한 결혼생활을 선택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잘살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그 믿음은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웃음은 달콤한 설탕 같았다.
그의 손길은 따뜻한 담요 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건 잿빛 환영에 불과했다.
해인은 신을 원망했다.
그러다 다시 자신을 원망했다.
분명히 보였던 사인을 무시했던 과거의 자신.
심장이 철렁 내려앉던 순간들을 애써 덮어버렸던 기억들.
그 미련과 후회는 밤마다 해인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머리는 무겁게 조여 오고, 가슴은 돌덩이처럼 눌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의 병은 몸을 타고 번져갔다.
해인의 몸은 하나둘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속이 타들어가는 듯 아팠고, 손끝은 늘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점점 미쳐갔다.
우리… 부부 상담이라도 받아보자.
남준은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꾸했다.
그 말은 해인의 귓속에서 금속이 긁히는 소리처럼 울렸다. 가슴이 조여와 숨이 막혔다.
해인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볼을 타고 떨어졌다.
하지만 남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눈빛에는 연민도, 당혹도 없었다.
그저 차갑게, 돌기둥처럼 앉아 있었다.
남준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아주 천천히 해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낮게, 마치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내 인생에서는 내가 원하는 건 뭐든 다 이뤄왔어. 그런데… 너만은 컨트롤이 안 된다.
‘컨트롤…?’
그것이 남준이 그녀를 선택한 진짜 이유였을까?
쉽게 조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게 동등한 부부관계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해인은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일주일 중 다섯, 여섯 날은 싸움으로 얼룩졌다.
하루 이틀 좋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지옥 같은 날들이었다.
남준은 해인을 사랑한 게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고치려 했다.
발걸음, 먹는 습관, 자는 자세, 심지어 말투까지.
해인의 존재 전체를 뜯어고치려 들었다.
“넌 이래야 돼. 그렇게 하면 안 돼. 제대로 해.”
그 소리에 해인의 가슴은 조금씩 썩어 문들어져갔다.
머리는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고, 우울은 깊어졌다.
그리고, 어느 날.
해인은 화장실에서 손에 무언가를 들고 서 있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꽉 쥔 그것은 떨리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보고 또 보았다.
테스트기의 작은 창에는 붉은 두 줄이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