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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일용 May 23. 2024

[홍시생각 17] 기자들의 그 강고한 기득권

노무현 대통령과의 추억…기자실·기자단 해체, 좌절의 기록

역대 대통령 선거 중 그렇게 간단명료한 적이 없었다.

그냥 노무현이었다.

"미국에 할 말은 하겠다"는 말 한마디로 끝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 역시 역대 다른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미국을 찾아가 '첫 인사를 드렸다.' 

미국 방문길에 '아마 미국이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정치범 수용소에 갇혔을 것'이라는 투의 실망스러운 소감을 밝혔다.  

이라크 전 참전을 결정했을 때는 1인 시위에 나섰다. '김선일 참사'가 났을 때는 참말로 고통스러웠다. 

한나라당과 대연정 구상, 삼성그룹과 협치를 보면서는 고개를 내저었다. 


반면에 '역시 노무현!'을 외친 적이 있다. 

분단 60여년만에 남북 기자들이 모여 '남북 언론인 통일토론회'(https://www.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13651)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노무현 정권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토론회는 2006년 11월 29일 금강산에서 열렸다. 앞서 약 두 달 전인 10월 9일 함북 길주군 풍계리에서 북측은 첫번째 핵실험을 실시해 전 세계를 경악케했다. 

이런 사변이 있었는데도 노무현 정권은 남북 언론인들의 만남을 문제시하지 않았다. 신기할 정도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지금 윤석열 정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림도 없을 것이다. 앞의 이명박 정권, 박근혜 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노 대통령에게 또 한번 고마움을 느낀 적이 있었다. 2007년 3월 세계기자연맹 특별총회가 열렸을 때, 나는 미국의 패권주의를 작심하고 비판했었다. 한국기자협회장으로서 개회사를 하면서 이른바 북핵문제를 촉발시킨 미국 패권주의, 그때는 물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핵무기 선제공격 전략을 세계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내놓고 비판했다. 

북핵문제를 미국이 촉발했다는 발언도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의전상 실수는 또 다른 문제였다. 사전에 청와대에 보낸 연설문과는 다른 내용으로 나중에 다시 작성한 연설문을   사전 통지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해버렸으니 청와대 쪽에서는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큰 실수인 줄 미처 몰랐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에는 이 정도로 언론자유가 있다'며 한마디 슬쩍 건드리는 정도로 대범하게 넘어갔다. 그래서인지 어느 누구도 이 발언을 문제삼지 않았다. 숭미(崇美)를 넘어 공미(恐美)에 찌들대로 찌든 데서 그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 대통령과 맺은 인연 중에는 두고두고 아쉬운 것도 있다. '취재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의 좌절이다. 

방향은 옳았으나 기득권을 가진 기자들의 거센 저항으로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취재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의 골자는 정부 청사 내 기자실을 없애는 대신 브리핑룸을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그 브리핑룸에는 기자단에 소속된 기자뿐만이 아니라 관심이 있는 기자는 누구든 들어와 브리핑을 들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문제될 소지가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른바 주요 매체 소속 기자들이 들고 일어나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진즉부터 한국기자협회를 비롯해 언론계에서는 기자실 기자단의 폐해를 지적왔다.  지금은 잠잠해졌지만,  언론개혁을 말할 때면 어김없이 단골 주제로 거론돼 왔다. 기자협회에서도 여러 차례 토론회 개최 등 공론장을 만들어 해결책을 모색해 왔다. 그 결과 기자실 기자단 해체가 답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이 사실이다. 다만 정보공개 제도가 완비돼야 한다는 전제를 붙였다. 


'기자실'은 공무원들이 근무하는 관공서 내에 마련돼 있다. 출입기자는 이 사무실에 매일 출퇴근한다. 정부 부처에서는 기자실에 보도자료를 전달하고 출입기자를 상대로 브리핑을 한다. 정부 부처에서 제공하는 사무실에서 정부 부처가 제공하는 보도자료를 받아보고, 부처 소속 공무원으로부터 브리핑을 받으니 관언유착, 정언유착이 생기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정부 정권을 비판하고 견제한다는 건 그저 원칙에 불과할 뿐이다. 


'기자실'이, 언뜻 듣기에는, 마치 정부 부처의 국, 실 중 하나인 것처럼 들린다고 비꼬는  소리도 들린다. 관공서 내 사무실에 날마다 출퇴근하고, 하는 일은  그들의 대변인 노릇이니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해야하나. 언론이 제4부라고는 하지만 관공서 내부 공간에서  자신이 속한 매체를 위해 사무(私務)를 보는 것은 엄연히 특혜이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특혜를 누리는가.  


기자단은 원래 바람직한 취지로 결성됐다. 힘 없는 기자 개인으로는 힘 센 정부 당국에 맞서기 힘들기 때문에 집단으로 대응하자는 게 원래 취지였다. 정보를 쥐고 있는 정부 당국자가 갑(甲)이고 이들로부터 정보를 캐내야 하는 기자는 을(乙)이기 마련인 역학관계에서 어쩔수없이 만들어 낸 고육지책인 셈이다. 

기자단이 원래 취지와는 동떨어진, 엉뚱한 방향으로 운영되고 있으니 문제이다. 매번 그렇지는 않지만, 남북관계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 기자단은 기사 방향을 조율한다. 어째 그리 기사가 천편일률적이냐는 독자들의 불만은 상당 부분 이 같은 조율에서 비롯된다. 기사 조율에는 출입처와 출입처 공무원의 입장을 배려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에 대해 출입처에서는 먹거리 조달, 즉 기사거리 정보 제공으로 보답한다.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이니 유착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노 대통령은 임기 말년에 접어들자 '버킷 리스트'를 작성했다고 들었다. 기자실 문제를 리스트 웃머리에 놓았다고 들었다. 임기 말년에 언론 건드려서 좋을 일도 없고, 언론개혁이 가능하지도 않다는 말도 쇠귀에 경읽기마냥 소용이 없을 정도로 강한 집착을 보였다고 한다. 


2007년 봄 정부 당국자로부터 언론선진화방안을 처음 들었을 때 나도 똑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기자실 기자단 문제 해결을 임기 말년이라고 회피하는 게 옳은 일이 아니라고 결론 지었다. 문제의 핵심은 원활한 정보공개, 정보유통이므로 정보공개 제도를 개선 보완하면 회원들도 납득하리라고 봤다. 


막상 기자실 폐지, 브리핑룸 설치가 공론화되자 반대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정보공개 제도를 개선 보완하면 된다"는 말은 "기자실에서 우리를 쫓아내려고 한다"는 선동에 파묻혀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기자협회 집행부 내부에서도 "왜 회장이 회원들을 못살게 구는 데 앞장 서느냐"는 비난이 잇따랐고 회원들 사이에서는 "역적 회장 탄핵" 주장까지 공공연히 나돌았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6·15 민족공동행사 참석 차 평양에 갔을 때였다. 행사 상황실에서 찾는다는 말을 듣고 가보니 서울에서 전화가 와 있었다. 내가 없는 사이 기자협회 집행부 회의가 열렸는데 17일로 예정된 '노무현 대통령 언론인과의 대화'에 기자협회장 불참을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평양 행사가 끝나면 곧바로 직항 편으로 김포공항에 내려 토론장으로 가겠다고 통지를 하고 왔는데 집행부에서 회의를 다시 열어 불참을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어처구니 없었다. 창피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했다.  "참석하겠다"고 했고 김포공항에서 토론장으로 직행했다. 토론회에서는 취재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을 개선한다는 데 합의를 봤지만 그것으로 기득권 기자들의 여론을 돌릴 수는 없었다.   


노 대통령 집권 초기인 2003년 11월 기자실에 대못을 박아버린 사건이 발생했었다. 김두관 경남지사 시절인 그 때 경남도청 공무원협의회는 기자실이 도청 간부들의 업무 공간을 침해하고, 기자들의 편의를 위해 예산이 낭비된다는 이유로 기자실 폐쇄를 시도했다. 


그 당시 "김두관이 우리를 기자실에서 내쫓으려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집권 말기의 '힘빠진' 대통령은 피투성이로 만들어 끝내 자결의 막다른 길로 내몰았다. 강자에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강한 한국 언론계의 너절한 풍토를 다시한번 보여줬다.


검사 '형님'은 기자  '아우'를 불러 정보를 흘려준다. 마치 형님이 주머니 돈 꺼내 동생 용돈 주는 것처럼 태연자약이다.  공보관은 기자실에 들러 기자단에게 보도자료를 전달한다. 기자단 소속이 아닌 여타 매체의 기자는 안중에도 없다. 기자단도 그런 정보 유통 방식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 정보가 세금으로 생산된 국민의 재산이므로 국민 모두가 주인이며 기자단에 소속된 몇몇 기자 것이 아니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기자단에 소속된 기자들만이 먼저 알고 먼저 써야 한다는 이상한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기자실, 기자단 문제의 핵심은 정보공개, 정보유통이다. 기자실 설치, 기자단 구성의 당초 취지는 원활한 정보공개, 정보유통이었으나 지금은 특정매체, 이른바 주요 매체의 정보독점 수단, 정보경색의 주원인으로 변질됐다. 그 과정에서 생겨난 관언유착, 정언유착으로 조중동 등 수구반동 매체가 여전히 기세등등 위세를 부리고, 이들 매체는 수구 반동 세력의 거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으로 보답하고 있다. 


자유로운 정보유통을 방해하는 장애물은 기자실, 기자단뿐만이 아니다. 국가보안법은 정보 고속도로의 최악의 장애물이다.     

"국가보안법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버리자"고 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그립다. 

오늘 5월 23일은 그의 15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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