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많은 시간을 멍하게 핸드폰을 보낸 때가 있었다. 잠깐 인스타그램을 열어 피드를 아래로 내리다보면 나와 연결된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올린 글들을 연속해서 볼 때가 있는데 그때 스쳐 본 하나의 격언이었다
'햇빛은 부유한 자의 얼굴에도, 가난한 자의 얼굴에도 비춘다' 라는 짧은 글이었다. 정말 그럴까
나는 세상은 공평하지 않으며 악한자가 벌을 받고 선한자가 복을 받는다 라는 말을 믿지 않는 편이다 내가 지금 사는 이 세상은 꽤 불공평하며 내가 노력한것의 발톱의 때만큼도 보상받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 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정을 하고나니 세상살이가 조금 덜 억울해졌고 한편으로는 편해짐을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 만족을 찾으면 되는일이었고 사소한 것에서 '행복하다' 라고 말 할 수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대단한 것을 꿈꾸는 내가 아니라, 아주 가볍고 일상적인 활동속에서 나는 하루하루를 채웠고 내 시간들을 만들어 나아갔다 그렇게 지금의 이 시간 속에 두다리를 곧게 펴고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은 이 글의 제목은 '가난이 묻은 (아빠의) 얼굴' 이었다 아빠는 언제나 근사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내가 본 아빠 인생의 마지막 얼굴은 그렇지 못해서 글의 주제를 벗어나 맴맴 돌게만 된다. 엄마와 아빠는 이혼을 했지만 나에게는 최선을 다했다. 적어도 당신들이 겪고있는 상황으로 자식 탓을 하거나 행패를 부리지 않았다. 어려운 환경속에서 어쨌든 자식을 모른척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고등학교때 수재였던 언니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종교에 빠졌고, 엄마아빠의 울부짖음도 듣지못하고 한참의 시간을 부모보다 더 큰 사랑이 있다고 믿으며 시간을 보냈다, 꽤 오랜시간이 흐르고 언니가 그 종교 단체 속에서 잘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며, 서로에게 짐이 되지않기 위해 각자가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때 언니는 정신조차도 온전치 못한 상태로 아빠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때 아빠는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아빠는 곧은 사람이었다. 정의로웠고. 남에게 피해주기를 싫어했고, 자존심도 강해서 도와달라는 이야기도 잘 하지 못했다. 큰 언론사를 퇴직할때에도 후배들을 밀어주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고 들었다
연이은 자영업이 망하고 아빠는 점점 초라해졌다. 그런 아빠의 품으로 다시 언니가 들어왔다. 언니가 돌아왔을때도 아빠는 올곧이 언니를 책임졌다.
엄마와 나도 있었지만 엄마는 함께 사는 사람이 있었고 . 나는 동생이고 자식이라는 이유로 책임을 면할 수 있었다 결국 아빠는 언니를 맡았다. 언니가 집에서 꽤나 먼곳까지 혼자 걸어 가다 정신을 잃었을때도 아빠는 생계수단이었던 일을 멈추고 언니에게 달려갔다. 제때 약을 먹지않아 감정이 격해졌을때도 아빠는 온 몸으로 언니를 막아섰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나는 도망쳤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이었지만 사실 그 집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결혼을 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어렵게 자격을 갖춘 아빠는 개인택시를 시작하기위해 애를썼지만 본인힘으론 역부족이었는지 나에게 돈을 빌렸다 사실 사위에게 빌리는거나 다름이 없었다.
몇번의 원금과 이자를 받았을까 자꾸만 제때에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아빠를 탓했다 남편앞에서 아빠흉을 대신 보는 것으로 남편의 마음을 달랬다 아빠가 미웠다. 결혼할때 뭐 하나 해준 것도 없으면서 사위돈 빌려 제때 갚지도 못하고 남편한테 아쉬운 소리를 해야하는 그때의 상황이 싫었다 친정이 힘이 되어주진 못할망정 제때 약속한 돈이라도 갚지 아빠가 미웠다 그렇게 몇일이 흘렀을까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아빠 왜 돈을 안갚아.. 우리도 대출받아 빌려준건데 사위한테 왜 연체됐는가..
설명이라도 하든가 미안하다고 한마디 하면 안되는거야?'
'싫어'
... 위궤양이라고 했다. 소화장애로 화장실 신호가 급하게 와서 택시영업이 어려웠고 어찌된일인지 식사도 하지못한다고 했다 빌린돈을 제때 갚지못하는 미움떄문에 아빠를 모른척하고지내다 오랜만에 병원에서 만난 아빠는 한없이 작고 외소했다 그 큰 덩치가 다 사라진 후 였다. 아빠는, 총각때의 시절로 돌아간것같다며 날씬해지고 싶었는데 다이어트 제대로 했다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내 어꺠를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