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슬이 없는 날, 비로소 보이는 것들

by 길손


어제 아침, 강물이 너무 아름다워서 베란다에 놓인 낡은 의자를 창가로 바짝 끌어당겼다. 태양이 수면 위로 쏟아지자 물결 하나하나가 빛을 머금고 수천, 수만 개의 작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빛들은 춤을 추듯 일렁였고, 서로 부딪히며 더 환하게 터져 나왔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황홀해서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찬란한 빛의 군무(群舞) 속에서는 세상의 모든 고통이 잠시 멀어지는 듯했다.

사진으로 다 담을 수 없는 장면이었지만, 그 모습을 남기고 싶어 사진을 찍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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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늘은 완전히 달랐다.

기대감을 안고 커튼을 젖혔으나, 눈앞의 강은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단 한 점의 떨림도 없이, 오직 태양 하나만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수면에 박혀 있었다. 거대한 거울 같은 강물 위에 윤슬은 단 한 조각도 없었다. 어제의 그 소란스럽도록 눈부신 빛의 축제는 온데간데없고, 무겁고 적막한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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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당황스러웠다. 뭐야? 왜 윤슬이 없어? 하나도 없어..

어제는 그토록 눈부셨는데, 왜 오늘은 이토록 메마른 풍경일까.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윤슬은 태양 혼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었다. 강물이 바람에 몸을 뒤척이고, 물결이 서로 부딪치며 표면을 끊임없이 깨뜨릴 때 비로소 빛이 산란하며 그 황홀한 반짝임이 되는 것이었다. 너무 고요하면 강은 빛을 잉태하지 못하고, 그저 태양을 그대로 투영하는 차가운 거울로 남을 뿐이었다. 완벽한 평온 속에는 역설적이게도 찬란함이 머물 자리가 없었다.


그 순간, 창밖의 풍경 위로 내 삶이 겹쳐 보였다.

지난 1년 반 동안 나는 길을 잃은 사람처럼 헤맸다. 퇴사 후 다시 시작하려 했지만, 세상은 내게 쉽게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밤새 이력서를 고쳐 써도 돌아오는 건 차가운 침묵뿐이었고, 간신히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려도 ‘나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야 했다. 거듭된 거절은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고, 나중에는 그 두려움 때문에 무엇도 시작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점점 세상에서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내 쓰임이 이미 다한 것은 아닐까, 하는 서늘한 공포가 매일 밤 나를 짓눌렀다.


설상가상으로 엄마가 떠났다. 내게 가장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존재 자체가 위로였던 엄마는 이제 없다. 더 이상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 따뜻한 손을 잡을 수 없다는 현실이 거대한 해일처럼 덮쳐와 숨통을 조여왔다. 슬픔과 절망이 뒤섞인 격랑 속에서 나는 허우적거렸다.


창밖의 강은 너무 고요해서 빛을 잃었지만, 반대로 내 안은 폭풍우가 몰아쳐 빛이 맺힐 틈이 없었다. 너무 잔잔해도, 너무 거칠어도 윤슬은 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하지만 오늘, 빛 한 점 없는 저 메마른 강을 보며 나는 비로소 나의 파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나를 집어삼킬 듯 몰아치는 이 격렬한 흔들림이, 언젠가 ‘적당한 물결’로 잦아드는 날이 오지 않을까. 지금은 파도가 너무 거세 빛이 산산이 흩어지고 있지만, 이 폭풍이 지나가고 물결이 서로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순간이 오면, 그때야말로 내 삶에도 눈부신 윤슬이 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내가 겪는 이 아픔들은 나를 부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밋밋했던 내 영혼을 깎아내어 빛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결을, 더 많은 면(面)을 만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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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전히 아프다. 불안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때로는 너무 지쳐서 모든 걸 놓고 싶어진다. 하지만 나는 이제 믿어보려 한다. 이 파도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그 상처의 틈새마다 언젠가 가장 아름다운 빛이 고일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내게 불어오는 바람과 물결을 조금 덜 두려워하기로 했다. 영원한 폭풍은 없다. 매일 울면서도 다시 일어나 책상 앞에 앉는 이 처절한 시간들이, 언젠가 적당한 물결이 되었을 때 내 인생의 가장 찬란한 윤슬로 돌아올 것이다.

오늘, 윤슬 없는 강 앞에서 나는 비로소 나의 파도를 끌어안았다. 아직은 아프지만, 이 파도가 빚어낼 찬란한 내일을 조용히 기다려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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