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메밀묵, 그리고 양은솥

by 길손

김치통이 하나 또 비워졌다.

빈 통을 씻어 베란다 창고에 넣으려다 창고 구석에 놓인 커다란 양은솥과 마주쳤다. 오른쪽 손잡이는 반쯤 부서졌고, 윤기 잃은 솥 뚜껑 위에 새겨진 꽃무늬는 겨우 흔적만 남아 있었다. 당장 버려도 아깝지 않을 이 솥은 엄마가 메밀묵을 쑬 때마다 쓰던 것이다. 그 옆에는 커다란 나무 주걱과, 메밀물을 걸러낼 때 쓰던 두 개의 나무 막대기도 함께 놓여 있었다.




엄마는 메밀묵을 자주 만드셨다.

엄마의 묵은 통메밀을 사기 위한 시장 나들이에서 시작된다. 배낭 가득 메밀을 사와서 깨끗이 씻어 하룻밤 불린 뒤, 믹서기에 나눠 갈아 면보에 거른다. 건더기에 남은 메밀까지 몇 번이고 치대어 헹궈내야 비로소 껍질만 남는다. 그 다음은 양은솥과 주걱의 차례다.


바닥에 놓여진 휴대용 버너 위에 커다란 양은솥이 자리한다. 그 안에 메밀물을 붓고 큰 대나무 주걱으로 휘휘 젓기 시작한다. 초반엔 쉽지만 묵이 점점 굳어가면 주걱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일어서서 온 몸으로 저어야 했다.


“사먹으면 되지 왜 이렇게 힘들게 만드노?”

걱정이 담긴 짜증을 쏟아 낸 나에게 엄마는 말씀하셨다.

“이런 거는 일도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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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완성된 묵은 큼지막하게 썰어서 쪽파가 듬뿍 들어간 양념장을 올려서 먹기도 하고, 시원한 묵사발로 먹기도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따끈한 묵밥이다.

토렴을 해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묵을 멸치 육수에 담고 양념장과 다진 김치, 김가루를 올린 후에 참기름을 한 바퀴 살짝 두른다. 한 입 크게 입에 넣는 순간 알싸한 양념과 짭쪼름한 김가루에 버무러진 묵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으스러진다. 아삭한 김치가 식감을 더하다가 고소한 참기름이 마무리해준다.




엄마는 항상 묵이 조금 남았을 때 밥을 말아 먹으라고 하셨다.

그렇게 먹으면 밥알이 탱글탱글 살아난다며.


묵밥은 내 다이어트의 최대 적이었다.

"아, 자꾸 먹으라고 하니까 살을 못빼잖아."

되도 않는 핑계를 대며 퉁명스럽게 받아 쳤지만, 사실은 한번만 더 권해 주길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메밀은 살 안찐다. 조금만 먹어라."

혹시 내가 먹겠다고 할까 기대하는 듯한 엄마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며 나는 마지못한 듯 말했다.

"그럼, 작은 그릇에 조금만 줘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슬쩍 웃음을 보이신 엄마는 바로 부엌으로 향하셨다.


엄마는 일반 면기에 묵밥을 가득 담아서 공기밥 한그릇과 같이 내오셨다.

"이렇게 많이 주면 어떡해? 아, 오늘도 다이어트 망했네."

‘그래도 음식은 남기면 안 되지’

결국 밥까지 말아서 다 먹어 치웠다.


"묵이 담긴 국에 밥을 말면 밥알이 탱글하게 살아나는 게 진짜 신기하긴 하다."

고맙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괜히 딴소리만 하는 내 앞에서 엄마는 "그렇지?" 하시면서 내 눈을 피해주듯 얼른 그릇을 치워 주셨다.




엄마는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을 때마다 메밀묵을 만드셨다. 값비싼 선물을 하자니 경제적인 부담이 있고, 저렴한 선물을 하자니 마음이 충분히 담긴 것 같지 않고 해서 선택한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런 것 밖에 없어서..”


엄마의 선물은 묵을 담은 큰 팩과 양념장을 담은 작은 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각 투명 팩에 담은 후 검은 비닐 봉지에 담기는 바람에 모양새가 영 아니었다. 그래도 그 선물을 받고 감동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엄마는 세상에 고마운 사람이 참 많으셨던 모양이다. 덕분에 우리 식구도 자주 메밀묵을 먹을 수 있었다.



언제든 원하면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엄마의 메밀묵을 못 먹은 지 5개월이 지났다.

갑작스러운 발병, 짧은 투병, 그리고 이별.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많이, 더 고맙게 먹을 걸.

이럴 줄 알았으면 만드는 법을 배워둘 걸.

오래된 양은솥은 아마도 꽤나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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