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꽤 자주 감정에 몸을 잘 맡긴다.
본인이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해보자
넌 좀 감정적인 편인 것 같아
그런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아니 그 이전에 어떤 기분인가? 우리는 감정적인 사람이라고 하면 뭔가 생각이라고는 1도 하지 않고 온종일 감정에 둘러싸여서 매일 롤러코스터를 타는 거 같은 상태인 사람이 떠오른다. 아니 근데 저 사람이 나를 그런 취급이나 하다니! 너무나 괘씸하다. 심지어 그래도 나는 비교적 꽤 스스로를 지성을 가지고 있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저 사람... 그냥 손절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 내가 얼마나 이성적인지 알려줘야겠다고도 생각할 수도 있다. 심지어는 그렇게 말한 사람이 감정적으로 나올 때도 나는 참았는데 조금 유치하지만 이제는 너도 그렇다는 것을 말해야겠다고 결심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이런 생각들이 든 원인이 무엇일까? 합리적인 분석의 결과인가? 진짜로 합리적인 분석을 했다면 어떤 인과관계를 어떤 모델링으로 분석했는가? 아니면 계량적인 평가의 결과인가? 그래, 당신은 몇 퍼센트의 확률로 이성적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그렇게 부정했던 나의 생각이 감정에 휩싸였기 때문은 아닐까? 역설적이지 않은가. 스스로가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감정적이란 소리를 들으면 감정 때문에 스스로가 이성적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니!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감정적인 존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당신에게 감정적이라고 말한 그 사람도 감정적인 존재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감정과 뇌의 호르몬 체계가 정상적인 자들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반박하겠답시고 소시오패스와 사이코패스를 데리고 오는 것은 비겁하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겠다.
다시 한번 말한다. 인간은 원래 감정적인 동물이다. 이 것은 선사시대부터 이어져 온 진화의 산물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인간은 지능이 있었지만 신체능력이나 공격력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고 그렇게 혼자가 아닌 부족 단위로 모여야 생존에 유리했다. 이렇게 사회가 탄생한다.
그리고 그 부족 사회에서는 포식자의 유무나 자연환경 상태 또는 수렵채집 상황 등을 효과적으로 빠르게 주변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비 언어적 표현이 필요했다. 특히 그중에서 감정의 표현과 해당 감정의 전달은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사회 안에서 감정적 자이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감정적이기만 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문명이란 것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수렵 채집 생활에서 농경생활로 생활양식을 전환하면서 농사를 잘 짓기 위한 판단 그리고 농산물을 상호 거래하면서 계산을 하기 위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발전시켜나간다. 물론 수렵 채집 시대에도 도구의 개발과 사용, 사냥 전략을 위한 이성의 발전이 진행되었지만, 우리는 정착하면서 이성적 자아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져 왔다.
엣 인디언(네이티브 아메리칸)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우리 마음속에는 항상 두 마리 늑대가 싸우고 있는데 한 마리는 늘 화가 나있으며 불만에 가득 차있고, 다른 하나는 항상 기쁨에 차있고 평화로우며 친절한데 이기는 쪽은 내가 먹이를 주는 쪽이다.
감정적 자아와 이성적 자아 또한 항상 내 안에서 서로 싸우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자아의 대립이 나를 만들어 낸다. 사실 싸우고 있다기 보단 이성적 자아라는 기수가 감정적 자아라는 말을 타고 있다고 하는 편이 더 낫겠다.
이 이야기는 상당히 희망적인 소리로 들릴 수 있다. 이성적 자아가 마음만 먹으면 감정적 자아를 잘 컨트롤해서 이성적 자아가 원하는 대로 감정적 자아를 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풀어놓고 싶을 때는 풀어놓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감정적 자아를 컨트롤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부터 감정적 자아를 잘 컨트롤하여 나를 지배하는 감정을 극복하여 비이성적 행동을 멈추며 이성을 향한 여정을 위한 세 가지 단계를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는 왜 편향을 가지고 태어난 걸까? 우리는 항상 쾌락을 원하고 고통은 피하려는 욕망이 있다. 이것을 <사고 과정의 쾌락 원칙>이라고 한다. 우리는 어김없이 이 욕망의 원칙을 중심으로 사고한다. 로버트 그린의 인간 본성의 법칙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진실을 찾고 있다”거나 “현실적이다”라고 생각하지만 나의 긴장을 이완시키거나 자존심을 세워주거나 우월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나는 증거를 살펴보고 대체로 이성적인 의사결정을 내려
우리가 의사결정을 할 때, "나는 내 감정에 끌려서 내 감정에 충실하게 의사결정을 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필요 이상으로 솔직한 사람이다! 보통 우리는 의사결정을 내리기 전에 모든 증거를 살펴보고 그것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도출된 결론이라고 "믿고 있다."
2008 년 네이처 뉴로사이언스 4월호에 출격적인 연구결과가 발표된다. 해당 연구의 실험은 피실험자들에게 오른쪽 혹은 왼쪽 버튼을 원하는 때에 누르라고 하고 뇌파를 측정했다. 실험 결과는 사람들은 버튼을 누르기 약 10초 전에 이미 뇌가 어떤 버튼을 누를 것인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다른 의사결정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미 생각을 정했으면서 그 생각이 이성적으로 도출됐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한 증거를 찾는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위험 부담이 높은 계획을 세울 때 더욱 확증편향이 나타나서 부정적인 결과가 아닌 긍정적인 결과에 마음이 쏠리게 되고, 더 큰 권력이 있을수록 더 많이 지배당하게 된다.
위 실험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줬지만 그 이후 나온 연구 결과들은 희망적이었다. 위에서 말한 그 이미 10초 전에 정한 무의식적인 뇌의 결정을 의식과 이성으로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신념을 부정하는 증거부터 찾아보면서 최대한 양쪽 증거를 회의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내가 이토록 확신한다면 틀림없는 사실일 거야
저 사람이 저렇게 확신에 차서 강하게 말하는 거 보면 그 아이디어를 아주 면밀하게 검토했기 때문일 거야
우린 간혹 확신과 사실을 혼동한다. 그래서 조심히 말하는 사람은 뭔가 의심스럽고 반대로 확신이 찬 리더가 아이디어를 아주 열정적으로 쏟아내면 괜히 믿음이 간다. 도로 위에서나 길바닥 위에서 시비가 붙으면 목소리 큰 놈이 짱이다.
심지어는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생각에 의심을 품는데 이때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에게 소리 높여 반박하는 방어적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일즈맨이나 선동가의 극적인 효과로 눈가림하는 심지어는 본인이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된 이야기에 취약하다.
나는 내가 상대하는 사람들을 잘 알고 있어. 내가 보는 것이 그들의 실체야!
라고 생각하는 바로 당신, 그리고 나, 우리는 사람들의 실체보다는 보이는 것을 볼 수밖에 없고 그런 겉모습이 다음과 같은 진실을 왜곡한다.
사람들은 훈련을 통해 사회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적절한 앞모습만 보여주려 한다.
우리는 후광효과에 잘 넘어간다. 누군가의 긍정적 모습을 보고 나면 그에 어울리는 또 다른 긍정적 특징을 가진다고 착각한다. (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부정적 모습을 보고 나면 부정적 특징이 더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외모가 준수하면 더 신뢰도 있게 보인다던가 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생각은 내 생각이야. 나는 우리 그룹의 말에 무조건 동조되는 사람이 아니야
인간은 태어나기를 사회적 동물로 태어났다. 그래서 나랑 같은 생각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괜히 반갑다. MBTI를 하면서 무슨 유형 모여라 하는 거랑 비슷한 것이다. 이런 집단의 끌림을 자각하지 못하지 때문에 온전히 내가 결정하여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정당이나 특정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슈에서 한 방향으로 모인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은 인지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
나는 내 경험과 실수에서 배워
우리는 동일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실수나 실패에 설명을 붙이지만 내 잘못을 그다지 자세히 들여다보기는 꺼린다. 매우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 환경, 순간적 오판 등을 탓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겉핥기식 반성이 이어지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나는 달라. 나는 남보다 더 이성적이고 윤리적이야
심지어는 이 글을 보면서 "나는 달라. 이런 말 안 해. 나는 나를 잘 알거든"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 문화와 사회에서 이성적이고, 점잖고 윤리적인 것이 장려되기 때문에 스스로 그렇다고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하지만 스스로 속이면서 남들의 잘못은 잘 보면서 내 잘못들은 합리화한다. 이성과 윤리는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각과 노력을 통해 고통스럽게 성취하는 것이다. 어렵지만 성숙을 동반해야 한다.
인간의 감정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즐겁고 편안한 생각을 하고 싶은 욕구와 같이 우리 내면의 충동으로부터 나오는 약한 감정과 외부의 특정한 자극이나 상황으로 촉발되는 강한 감정이다.
특히 이 강한 감정이 문제인데 흥분의 정도가 높아서 감정을 생각할수록 더 증폭되고 그 감정에 집중력을 쓰면서 감정 자체에 집중하게 돼서 의식과 이성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무의식 상태가 된다. 그리고 웬만하면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한 채 끝을 맺는다.
이때 보통 사람들이 "내가 뭔가에 씌었었나 봐"라고들 하는데 실제로 대뇌변연계에 몸을 완전히 탈취당한 거라고 볼 수 있으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이런 강한 감점으로 정신줄을 놔버리지 않으려면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드는지 그 발작 버튼을 반드시 미리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타인의 발작 버튼도 알아두면 좋다. 다음은 강한 감정을 만들 수 있는 원인들이다.
특히 민감한 시기이기 때문에 부모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어른이 된 후에도 비슷한 상황에서 부정적 혹은 긍정적 기억이 되살아나고 그에 따른 강력한 화학물질이나 호르몬 등이 분비된다.
만약, 어머니에게 버려졌다는 기분을 어릴 때 경험했다면 여자 친구에게도 버려진다는 기분을 느끼며 강한 감정에 휩싸일 수 있다. 이때는 자신이나 타인의 행동의 변화를 파악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 이후 한 발짝 떨어져서 감정의 출처와 이러한 트리거가 자신을 어떤 패턴으로 이끌고 가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갑작스럽게 성공이나 승리를 하면 신경전달물질들이 강력한 흥분을 해서 같은 경험을 반복하고 싶은 욕구로 이어진다. 노력이나 운은 모르겠고 같은 시도를 반복한다. 도박중독자나 거품경제에서 사업하는 사람처럼 지속적인 성공은 맛볼 수가 없다. 그 이후에는 추락만이 기다린다.
반대로 뜻밖에 실패나 연속적 실패 또한 비이성적 반응을 야기하며, 무력감과 배패주의가 마음을 짓누른다. 이 두 가지 케이스 모두 한발 물러나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 성공은 회의주의적 시각이 실패는 낙천주의적 시각이 필요하다. 특히나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된다면 더욱 경계해야 한다.
압박감이 증가한다는 것은 스트레스 상황으로 자제력은 사라지고 화를 내거나 옹졸해지는 등 주도면밀하게 숨겨온 원시적인 단점이 깨어나 이성을 압도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압박감 수준이나 스트레스 수준이 높아지는 것을 주의 깊고 객관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특정 누군가가 나의 강력한 감정을 촉발시키는 경우가 있다. 이런 사람들은 온갖 감정을 타인에게 투사하여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한테는 어떤 영향을 주는지 잘 살펴서 거리를 둬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과장된 이미지와 위장을 간파해서 인간적인 모습을 찾아내서 환상을 깨버린다.
위에서 언급한 집단 편향이 강하게 나타나면 집단은 광기에 사로잡히게 된다. 스포츠 경기장이나 콘서트장에서야 이런 것이 좋지만 평상시에 특정 집단에게 이런 모습이 나타나면 상당히 위험하다. 선동가들은 소속감을 느끼도록 해서 동질감을 만든 다음 구체적인 솔루션이 아닌 감정이 가득 실린 두루뭉술하고 고귀한 이야기만 들먹거리면서 집단을 물들인다. 집단을 되돌릴 방법은 없으니 거리를 두고 독립적 사고를 침범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아까 말했듯이 이성적 자아는 비이성적 자아라는 말을 컨트롤하는 기수다. 우리가 항상 비이성적인 것 같지만 희망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역사적으로 모든 문화권에서 높은 이성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존재했다. 그리고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이 이성적이었던 순간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적 자아는 어떻게 불러낼 수 있을까?
감정적 자아가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나를 지배하는지 이해하면 통제가 가능해진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비효율적인 의사결정에 패턴이 있는지 혹은 숨겨진 불안이 있는지를 파악한다.
동시에 나의 정점과 함께 남들과 다른 점을 파악해서 내 관심사와 능력에 맞는 목표를 설정하면 집단 편향과 집단 효과에 저항할 수 있게 된다.
화가 났는가? 왜 화가 났는가? 별거 아닌 이유로 화가 났는가? 그렇다면 다른 무언가 혹은 감정을 자극하는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확실한 신호다. 트리거를 반드시 파악해야 한다. 본인의 경우는 비이성적 자아가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 열등감이었고 그 열등감은 인정받지 못하고 학대당한 어린 시절로부터 촉발되었다.
본인을 관찰할 때는 객관적인 위치에서 관찰해야 하며 이때 자존심은 본인에 대한 환상을 유지시켜 순간적으로는 위안이 되지만 장기적으로는 방어적으로 만들어 위험하다. 일기를 아주 솔직하게 쓰는 것도 도움이 된다.
대응이 필요하다면 그 즉시 대응을 하지 말고 헌 걸음 물러나는 편이 좋다. 압박감을 심하게 느낀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누군가 일을 망쳐놔서 이메일로 장문의 욕을 썼다면 그 메일은 내일 스스로 다시 읽고 나서 보내보자. 누군가 일을 제안한다면 그 자리에서 대답하지 말고 하루 정도 감정을 다운시킨다. 시간을 오래 가질수록 여유가 생기고 큰 그림이 보인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을 심판하고 나처럼 바꾸려고 시도하지만 좀처럼 불가능하여 좌절한다. 그러니 사람을 하나의 현상으로 대하고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 편이 좋다. 오히려 저런 사람도 있구나 하며 연구 대상화하면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최악인 사람들도 본인들만의 개똥 논리가 있을 테니 그런 논리를 이해(감정적으로 이해해주라는 것이 아니다)하고 탐구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우리의 감정과 사고는 분리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적절한 배분이 필요하다. 우리는 최대한 많이 생각한 이후에 행동해야 하고 결정한 이후에는 대담하게 밀어붙여야 한다. 회의론과 낙관론 사이에도 균형을 이뤄 회의적 태도와 호기심 그 사이에 위치하려 해야 한다.
위에서 말한 인디언 늑대 이야기처럼 우리는 이성에게 더 먹이를 줄 필요가 있다. 물론 감정을 돌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는 이성적 자아에게 관심을 쏟을 필요가 있다.
이 내용은 로버트 그린의 <인간 본성의 법칙 - 1장 비이성적 행동의 법칙>에 나오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우리가 감정적 자아를 지니고 있는 감정적 존재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반드시 인지하고 이성적 자아를 잘 활용한다면 우리는 감정에 몸을 빼앗겨버려 말이 사람을 타버리는 그런 이상한 상황은 연출되지 않을 것이다. 미지막으로 아르투어 오펜하이머의 말을 인용하며 마친다.
"뜻밖에 아주 야비하고 어이없는 일을 당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짜증 내지 마라. 그냥 지식이 하나 늘었다고 생각하라. 인간의 성격을 공부해가던 중에 고려해야 할 요소가 새로 하나 나타난 것뿐이다. 우연히 아주 특이한 광물 표본을 손에 넣은 광물학자와 같은 태도를 취하라."
- 아르투어 오펜하이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