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 오스틴에 봄이 온 게 느껴진다. 2월의 끝자락, 따스한 햇살을 머금고 하나둘 고개를 내미는 꽃봉오리들과 파릇해지는 잔디를 보고 있으면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린다. 문득 작년, 그리고 2년 전, 3년 전의 이맘때를 떠올려본다.
3년 전의 나는 업계 1, 2위를 다투던 우리 회사의 CEO까지 직접 나서서 공을 들였을 만큼, 규모도 크고 경쟁도 치열했던 프로젝트의 제안을 받은 직후였다. 전문가가 귀하고 관계망이 좁은 이 업계에서, 모두가 주목하는 그 압도적인 무게감이 나를 짓눌렀다. 잘 해내고 싶다는 욕심과, 혹시라도 내가 부족하지는 않을까 밀려오는 두려움이 뒤섞여 밤잠을 설치던 시절이었다.
그 압박감은 2년 전까지 이어졌다. 결혼을 불과 몇 주 앞두고 떠났던 싱가포르와 아일랜드 출장.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멘탈은 바스러질 대로 바스러져 "이 일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곧이어 찾아간 발리에서의 짧은 휴식은 달콤했지만, 마음 한편엔 여전히 프로젝트에 대한 강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때의 나는 곁에 있는 남편보다 눈앞의 일이 더 중요했던 것 같다. 왜인지 모르게 놓을 수 없었던 그 치열함이 나를 갉아먹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그리고 작년. 경쟁사로 이직하며 다시금 내 브랜드를 쌓아 올려야 했던 시간들. 다시 한번 나를 증명해 내기 위해 신발 끈을 조여 맸던 그 봄을 지나, 이제야 나는 비로소 숨을 고른다.
하지만 올해의 나는 조금 다르다. 3년 전엔 상상도 못 했던 '평온함'이 내 안에 자리 잡았다. 가끔은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된다. AI가 가져온 기술의 파도가 정말 내 일을 이토록 수월하게 만들어준 덕분인지, 아니면 내 안에 찾아온 작고 소중한 새로운 생명이 삶의 우선순위를 통째로 뒤흔들어 놓은 덕분인지. 아마도 그 둘 모두일 것이다. 기술이 덜어준 업무의 무게만큼, 내 마음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커리어를 넘어 더 본질적인 곳을 향하게 되었다. 분명한 건, 이제 '일'은 더 이상 내 삶의 주인공 자리를 독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제 나는 일을 대할 때 '전부'가 아닌 '일부'로 바라보는 단단한 삶의 무게중심을 갖게 되었다. 올해의 목표는 명확하다. 어렵게 찾아낸 이 소중한 밸런스를 지켜나가는 것. 그래서 이번 달엔 아무 이유 없이 휴가를 냈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을 먹고, 좋아하는 빈티지 옷 쇼핑을 하고, 연습장에서 골프공을 맞히며 보낸 소소한 하루. 주중이지만 주말 같은 그 평화로운 시간들이 나를 다시 숨 쉬게 한다.
이제 16주 차가 된 우리 '쨍쨍이', 그리고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늘 묵묵히 내 옆을 지켜준 남편. 이 소중한 사람들이 내 곁에 있다는 기적 같은 사실에 감사하며, 나는 완벽해지려 애쓰는 대신 평온하기를 선택하기로 했다.
방황하던 계절을 지나 드디어 내 마음에도 봄이 왔다. 지금의 이 평온함이 내 삶을 지탱하는 가장 깊은 뿌리가 되어주길 바라며, 나는 오늘도 느리지만 확실한 한 걸음을 내디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