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개강 첫날 자기소개를 하다가

대학원 개강을 맞은 직장인의 소회: 나는 도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럴까

by 도나윤

3월 첫 주, 대학원 개강



학교 가는 길

설렘 실종

오랜만에 퇴근하고 학교에 갔다.

이상했다. 학교 가는 길이 하나도 설레지가 않았다. 첫 학기에는 지옥을 탈출하듯 사무실을 뛰쳐나와 학교 도망치는이 매번 가슴 떨리고 벅찼는데 말이다. 교는 나의 오랜 갈증을 해소해 주는 곳이자 다 죽어가 영혼 목을 축여 생명수 같은 존재였다.


'근데 왜 더 이상 설레지가 않?'

이 당황스러운 사태를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가설을 세워보았다.


가설 1. 불과 한 학기만에 학업에 흥미를 잃었다.

보통 직장인들은 회사에서 학비도 일부 지원받으면서 업무 유관 학위를 따러 야간대 간다는데, 나는 정이 너무 커서 100% 내돈내산, 업무 무관 학위를 따러 야간 진학했다. 이렇게 큰맘 먹고 시작한 공부인데 벌써 흥미를 잃었다고? 아무리 내가 변덕이라지만 이것만큼은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럴 리 없다. 제발 아니길 바란다. 이 경우라면 나는 당장 자퇴를 해야 마땅하다.


가설 2. 방학 동안 잠시 잊혀 것뿐이다.

정말 부끄럽지만... 나는 방학 동안 한 번 안 펴 본 '주둥이로만 석사생'이다. 아무리 신입생이었다지만 정상은 아니다. 뭐 나름 사정은 있었다. 두 달 동안 정말 공사가 다망했다. 뮤지컬 공연 올리랴, 스윙댄스 공연 하랴, 남미여행 다녀오랴, 도저히 각 잡고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도 도파민을 연속으로 때려 맞고 역치가 높아져서 더 이상 지적 호기심 충족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만약 이 우라면 시간이 자연스럽게 해결해 주리라 믿는다. 파민이 빠진 후 칠만 일에 찌들면 아마도 금세 다시 생명수를 애타게 찾게 되리라...


분명히 가슴이 뛰는 것 같다고 온갖 요란을 떨며 시작한 공부인데 그냥 내 착각이었을까. 한 학기만에 설렘이 실종될 줄이야. 도대체 나는 커서 뭐가 되려고 이 모양일까?



첫 수업 시간

장황한 자기소개


첫 수업 시간, 교수님께서 한 명씩 자기소개 시간을 갖자고 하셨다. 교수님의 특별 주문은 '자신을 최대한 많이 보여주세요!'


맨 뒷자리에 앉은 내 차례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학과 2학기생 XXX입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뒤로 돌린 청중들을 향해 좌우로 배꼽인사를 2회 실시했다.


"저는 학부는 ○○학과를 졸업해서 ●●쪽으로 취업을 했구요, 거의 10년째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 청중들 : 끄덕

●●와 전혀 상관없는 ♥♥까지 이야기를 이어가려면 자기소개가 아주 장황해진다.


"근데 제가 글쎄,
취업을 잘못한 거예요!

직장은 나쁘지 않은데, 일이... 진짜 저랑 너무 안 맞는 거예요. 이유야 여러 가지지만 일단 제 안에 에너지가 너무 많아서 체질적으로 도저히 이게 맞을 수가 없거든요?"


- 청중들 : 끄덕끄덕

강의실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자기소개 치고 조금 과한 제스처와 표정에서기는 분위기만으로도 나와 ●●쪽이 쉽사리 매칭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저는,
(pause)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 청중들 : ??

능이라는 단어가 왜 갑자기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다. 본능적으로 튀어나왔다.


"춤추고, 노래하고, 연기하고, 주로 무대를 많이 찾아다녔습니다. 그냥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았어요.

제가 ♡♡도 좋아해서 취미로 하다가 예전부터 관심 있었던 ♥♥쪽을 접하게 됐는데,
이건 내가 진짜 잘할 수 있겠다, 그런 확신이 들어서 늦었지만 석사까지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30대가 되면 '저는 무슨 일을 합니다', 나를 한 줄로 소개할 수 있는 그런 직업을 갖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마음의 소리에 너무 충실하게 귀를 기울였나...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자기소개가 점점 더 장황해진다. 도대체 나는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러는 걸까?




집에 가는 길

아직도 직업은 없습니다만...


나는 아직도 직업이 없다. 너도나도 N잡러인 요즘 세상에 나는 자칭 0잡러다. 직장은 있다. 덕업일치에 실패했을 뿐. 20대의 나는 나다운 직업을 갖지 못한 것이 인생 최대 고민이다. 한때 내가 원했던 직장에 속했지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부품으로 소모되는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그렇다고 어디 내세울만한 특기도 하나 없고, 내가 가진 거라곤 과도한 열정, 잡다한 관심사 그리고 어정쩡한 재능뿐. 그것들을 싸그리 끌어모아 길을 찾아보겠다고 사방팔방 참 열심히도 들쑤시고 다녔다.


30대의 나는 여전히 성에 차는 직업을 찾지 못했다. 근데 요즘은 일찍이 직업을 갖지 못한 것이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낮에는 그냥 직장인으로, 저녁엔 대학원생으로, 주말엔 자칭 아티스트로, 그리고 틈틈이 여행가 사는 지금이 너무 좋다. 어처구니없는 장래희망을 상상 속에 품고 사는 재미, 끊임없이 나의 쓸모를 탐구하고 존재가치를 창조해 나가는 맛이 있다. 이러다 어느 날 진짜 직업이 생겨버리면, 거기에 묶여서 새로운 가능성을 놓치는 건 아닐까 아쉬운 마음이 들 것 같다.


지난 학기, 내 이야기를 듣고 교수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다.

'그럼 선생님은, 나중에 뭐가 되고 싶어요?'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여러 가지가 떠올라서 '♥♥요!'라고 곧바로 대답지 못했다. 개강을 맞아 이 질문을 다시 곱씹어본다. 큰일이다. 이번 학기에는 머릿속에 더 많은 상상화가 그려진다.


30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허황된 꿈에 젖어 사는 나....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나의 망상을 응원한다. 이렇게 태어난 걸 뭐 어떡해... 1년 뒤, 3년 뒤, 10년, 30년 뒤에는 뭐라고 자기소개를 하고 있을는지 궁금해진다. 도대체 나는 커서 뭐가 되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