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자유는 가능한가
해방감.
그 답답함을 벗어던지고 느끼는 짜릿함은 일종의 마약이다. 온갖 부정적 수식어가 붙은 일상 속에서 이보다 더 갈구하게 되는 욕망이 있을까. 모든 걸 훌훌 버리고 떠나자는 어느 노래의 한 구절에서 우리는 왜 그토록 설렘을 느끼는가. 그 감정은 우리가 얼마나 깊숙한 무언가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는지를 가장 날카롭게 드러낸다. 해방감 속에서 맛보는 자유, 그리고 자유 속에서 확인되는 ‘나’라는 존재. 자기 존재가 또렷하게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이 해방감의 본질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끔 훌쩍 떠나기도 하고, 자극적인 음식을 탐하거나, 사랑하는 이와 둘만의 시간을 찾으며 잠시나마 일상에서 이탈하려 한다. 하지만 크게 들이마신 해방의 산뜻함은 그리도 짧다. 곧 숨 쉬듯 빠져나가 다시 채워 넣어야 할 공백으로 돌아가 버린다. 고통이 있기에 해방이 존재한다는 아이러니는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리듬과도 같다. 우리는 역설적으로 ‘해방’이라는 이름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해방을 향해 팔을 걷어붙인다. 해방은 가만히 주어지기보다 행동이 뒷받침될 때에만 얻을 수 있는 과실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눈앞에 성취가 아른거리면 사람은 평소보다 더 힘을 낸다. 너무 빠르게 달리다 숨이 차 멈추기도 하고, 너무 힘든 나머지 애초에 그 과일은 실 것이라며 돌아서 버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해방의 짜릿함을 위해 우리는 고통을 견디며, 때로는 그 고통마저 기꺼이 즐기며 살아간다.
일부 사람들은 고통과 무료함에서 벗어나는 가장 손쉬운 길로 마약을 택한다. 어찌 보면 가장 싸고 빠른 해방일 것이다. 그 해방은 분명 다른 무엇보다 강렬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정점에서 내려오는 순간, 그 달콤함이 약속했던 자유는 낭떠러지처럼 추락한다. 그들은 다시 거래처를 찾고, 다시 손을 내민다. 자신을 깎아내리면서도 얻고 싶어 하는 그 궁극의 카타르시스는 왜 영원할 수 없는가. 완전한 해방, 일시성을 벗어난 자유는 애초에 가능한 것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순간 ‘해방을 갈구하려는 행위’ 자체를 포기하기도 한다. 해방된 인간이라는 이상이 허상에 가깝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아가기 때문이다.
싯다르타가 오얏나무 아래에서 삶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치열한 고행을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해방이라는 단어가 마치 신기루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마지막에 정말 해방되어 부처가 되었을까. 아니면 인간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였기에 그의 해탈이 신격화되었을까. 어쩌면 그는 완전한 해방의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 그 가능성을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한 상징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인간으로 존재하는 이상 영원한 해방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욕망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가 해방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의 상태라 부르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는 마음, 혹은 하기 싫어하는 마음조차 모두 삶이라는 행위의 연장선에 있다. 해방을 향해 고통을 견디고 다시 허무로 돌아갔다가 또다시 욕망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이 순환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해방은 완성되는 이상이 아닌 살아 있는 동안 계속해서 향하게 되는 방향에 가깝다.
결국 인간은 완전한 해방이 아닌 해방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 속에서 빛난다. 해방은 이상으로 보이는 우리가 끝내 도달하지 못할 방향성이며, 그 방향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
우리네는 저마다 해방이라는 굴레,
그 무겁지만 아름다운 왕관을 쓰고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