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by 재원




*


메모지에 이름을 써서 냉장고에 붙여두었다. 후- 입바람을 길게 불었다. 팔락거리며 메모지들이 날아갔다. 제일 멀리 나간 메모지를 줍다 문득, 제일 처음 나가떨어진 메모지를 붙들었다. 재원, 나는 그때부터 나를 재원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가장 멀리 나아가지 못하고 접착력이 부족해 진득하지 못한 것. 그 팔락거리는 가벼움이 어떤 이름이든 나에게 붙이고 싶게끔 만들었다. 나는 재원, 가끔은 청록, 침잠, 슬픔, 괴로움과 고독, 희, 소다, 발광어류, 5번, 은총 그 모든 순간에 있다는 것을. 남기고 싶었다. 남은 이름들은 주워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것들은 한참 뒤 모두 구겨지고 먼지가 달라붙어 더러워진 채로 연필 흑연심과 함께 가방 바닥에서 발견되었다.

*

아무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

엄마는 인생에서 가장 처음으로 나를 부정한 사람이에요. 나는 그때까지 몰랐는데, 이제 무언가 해야만 엄마의 사랑을 받을 수 있더군요. 어머니의 사랑은 무한하고 항상 고르지 아니하며, 필연적이거나, 당연한 것이 아니었어요. 그때 알았죠. 나의 엄마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요. 서툴게 따라 그은 성호는 누구의 십자가지.

*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어.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꿈에서는 감당할 수 있단 말이야. 그땐 최면에 걸리잖아, 뭐든 당연히 그럴듯하잖아. 내 인생에도 소설에도 없는 개연성 같은 거, 꿈에서는 생기던데 왜 그러는 걸까. 사실 우리는 착각하고 있는 거야. 엉뚱한 일이 더 필연적이고 운명적이었던 것이야. 신은 나를 위해 불행을 계획한 거야.

*

퇴사를 했다. 따돌림을 당했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잘하고 싶었을 뿐인데,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은 내게 한 마디도 걸지 않았고, 상의조차 하지 않았기에 나는 매일 지각했고 인생은 한없이 미뤄지고 있었다.

*

그 림 일 기

어제 엄마와 아빠가 싸웠다. 나는 종이꽃을 선물했고
그것은 모두 갈기갈기 찢겨 강에 내던져졌다
그 뒤로 나는 꽃을 찢어 강에 내던지곤 했다.
선생님은 거짓말로 일기를 쓰지 말라며 내 일기를 찢어서 버리셨다.
아무리 뾰족한 것으로 긁어내도 종이가 뜯어진 자리는 지저분했다.
이렇게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참 재미있었다.

*


발랑 까져버린 피는 소금물을 아무리 마셔도 정화가 안 된단다. 그러니까 결국엔 피를 뽑아야 하는 거지. 피를 뽑다 보면 눈앞이 새하얘지며 정신이 날아갈 듯하다. 그것을 은총으로 부른다고, 혜미는 얘기해주었다. 혜미가 키스할 때 페인트 사탕의 싸구려 향료 냄새가 났고 혓바닥은 비빌수록 텁텁하고 시었다. 입냄새를 계속 맡으려고 할수록 산소호흡기가 뿌얘졌다. 끝.

*

아무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용서한다는 거야. 그것은 그럴만한 이유를 만들어주고 맥락을 주는 일이야. 그를 위치시켜주는 일이야.

*

페터 슐레밀이 팔아버린 건 그림자일까, 인간으로서의 권리일까. 검은 남자는 사실 알았잖아. 그딴 게 없어도 재화로 인간 흉내 같은 거 얼마든 낼 수 있다는 거. 아, 나의 아름다운 그림자. 키스해 줘.

*

나이가 삼십이 되어도 사람을 따돌리는 누군가가 있다. 나는 저렇게 크지 말아야지 한 사람이 열댓 명.


*

바깥은 우중, 우중, 우중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오늘은 휴업합니다
빗물에 목을 잘 닦아놔야 해서요

이전 04화모과에게, 진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