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에게,
사랑했어요. [2024.09.08.14:04]
국립국어원 표준발음법에 따라, ‘빛’과 ‘빚’은 다음과 같이 소리난다. [빋]. 한국어에서 빛과 빚을 구분하는 방법은 단어가 발화된 맥락을 읽는 수밖에 없다. ‘빚’은 지고, ‘빛’은 난다. 빚지고 빛나는 것. 그것을 삶이라고 나는 믿었다. [2024.09.08.14:24]
나는 오래도록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어요. 당신에게도, 세상에도. 나에겐 원죄라는 게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신을 믿지 않아도 인간에게는 모두 원죄가 있다고 우리는 그걸 평생에 걸쳐 갚아나가야 한다고 여겼어요.
그러니까요, 팔이 시리고 저리도록 차가운 것들을 품에 안고 가는 길에 눈물도 나지 않았어요. 이상하죠. 감정이란 건 언제 소화될 수 있나요. 사랑을 상실하지 않고, 서로를 잃지 않는 방법은 어디에 있어요? 여전히 모과가 잠들 때, 무언가를 먹는 듯 우물거리는 입술을 사랑하는데.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온갖 것에서 피 냄새가 났어요. 밤새 잘못 지혈되어서 모과가 죽을까 봐 겁이 났어요. 지하 주차장을 걷는데, 집까지 거리가 참 멀다고 생각했어요. 울면서 뛰었지요. 형광등 아래로 빛이 비산하며 번졌어요. 그 속에서 십자가 하나가 자꾸 생겼다 사라졌어요. 눈을 깜빡일 때마다 길어졌다 짧아지며, 나를 찌르듯 원망하는 것 같았어요.
글이 읽히지 않는 거예요. 나는 평생 글을 읽고 살았는데, 에탄올인지 과산화수소수인지 글씨가 읽히지 않아서, 모든 걸 그냥 쓸어 담고 계산했는데 그 과정이 너무 느려서 이미 당신이 식어있을 것만 같았어요.
눈엣가시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피를 닦는 일뿐이었어요.
그때 느낀 건 이기심이었을까요, 편협한 사고였을까요, 당연했을까요. 그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미웠어요. 한사코 입원은 싫은 모과의 의사를 존중하면서 어떻게 모과를 지킬 수 있는 건지. 모과의 의사는 어떻게 존중되어야 하는지. 세상은 어떻게 감시하지 않으면서 보호할 수 있는 건지. 보호와 감시가 하나 같아서 심장이 높고 빠르게 뛰었어요. 안전망은 형편없고, 모과를 돌보는 나는 감시자가 아니면서 어떻게 보호자가 될 수 있는지 몰랐어요.
당신이 그랬잖아요. 내 마음이 뜬 것 같다고. 내가 원하는 것만 해주려고 하고, 나는 그렇게 배웠으니까요. 받고 싶은 대로 하라. 그래야지 원하는 것을 받을 수 있다고. 식사 예절이 없고, 먹는 모습이 역겨웠다고 말했잖아요. 내가 선택한 걸 모두 당신 탓으로 돌린다고 했잖아요. 내게는 히스테리가 있다고 했잖아요. 기본을 하자고, 미안한 일을 만들지 말자고.
순간을 믿기엔 나는 너무 어리고, 영원을 믿기엔 너무 나이 들어버린 기분이 들어요.
슬픔 한 가운데 있는 자는 휘몰아치는 태풍의 눈 한 가운데에 있는 것과 같아요. 모과는 눈 위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그 옆의 나는 바람에 휩쓸려서 결코 모과에게 가닿지 못할 것 같아요. 그 태풍 속에서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동시에 일어났어요.
난 나를 너무 오래도록 미워한 거 같아요. 모과가 세상에서 가장 귀했기 때문인지. 모과가 모과조차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나요. 생각보다 어렸던 거 같아요. 그게 너무 신기했어요. 게다가 나 생각보다 그렇게 못나지 않았어요. 이상한 일이죠. 당신은 또 자만하고 있다고 고집을 부린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모과, 나는 생각보다 못나지 않은 것 같아요.
모과는 나를 영영 구해주지 않고, 내가 모과를 구하기만을 기다렸잖아요. 나는 모과가 나를 구해줄 거라고 믿었고, 내가 모과를 구해야만 구해질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런데요, 모과, 나 지금 그때의 나를 구했어요. 나조차 내 편이 되어주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이제야 좀 보여요. 되게 어리더라고요. 엄청나게 못나지도 않았고요. 최선을 다했어요. 하지만 몰랐죠. 심지어 지금, 나를 구하고 있는 이 순간까지도. 이게 자기 연민은 아닐까, 자만으로 흐를까 봐 또 겁이 나요. 하지만, 나 이제는 이 마음이 너무 귀하게 느껴져요. 나를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점점 내가 불쌍해져요.
난 말이에요,
모과,
어리고 예뻤어요.
사랑하려고 버티면서 빚을 갚으며
그렇게 빛을 찾아갔어요.
빛은 온 우주를 돌고 돌아 이제야 나에게 왔네요.
모과, 나는 당신에게 나의 최선을 그려주고 싶었어요. 세상이 그리는 최선 같은 건 우리에겐 아무 소용 없었잖아요. 그런 내 최선의 그림이 당신에겐 어쩌면 필요 없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했을지 모르겠지만. 모과, 나 당신을 정말로 사랑했어요.
사랑했어요. 어제도 오늘도. 하지만 이제 내일도, 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이제 나는 당신을 서서히 미워하게 되었어요…….
진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