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에게,

by 재원

강에게


안녕, 잘 지내? 편지를 꽤 자주 주고받았던 게 기억이 나. 그때 나누던 편지를 나는 지금도 가끔 읽어. 편지라는 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한순간을 보내는 것과 같대. 지금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야속할 만큼, 네가 그립다. 편지를 읽을 때면, 우리가 다시는 즐겁게 웃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 그때와의 간극이, 너무 달라져 버린 내가, 알 수 없는 네가 더 선명해진다.


우리 미술관에 들러야 한다는 것도 까먹고 소품샵에 들어가서 다이어리를 나란히 하나씩 사 들고 나왔던 거 기억나니. 우리는 다이어리를 펼쳐보고 나서야 원하던 다이어리가 아니었음을 깨달았잖아. 그리드나 무지 노트를 원했는데 위클리였지. 그게 뭐라고 우리는 엄청 깔깔 웃으면서 그 동네가 떠나가라 웃고는 술집에 들어가서 서로의 다이어리에 글을 썼잖아. 하루 하루 나뉜 구획은 의미도 없다는 듯이 하루와 찰나에 있던 일을 일주일 내리 있었던 일인 양 길게 쓰고 순간의 말을 영원히 속삭인 양 썼어. 가로등 밑에서 점멸하는 듯한 키스는, 깜빡이는 찰나를 백야처럼 길게 길게 남겼고. 그때 너무 길게 써버렸나 봐 그 달 위클리는 딱 일주일 남았고 거기에 한 달을 구겨 넣으려고 무리를 해서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됐나.


나는 네게 줄곧 기도해 왔는데, 신이 그걸 들어줬는지는 모르겠다. 남을 위한 마음이 항상 언젠가는 빛을 발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믿는데도, 기도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게 기도를 전해줄 너도 없다는 게 슬프다.


요즘 나는 잠을 못 자. 뜬 눈이 아니라 감은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기분. 잠으로부터 거부당한 채 끝없는 생각과 꿈 사이 어딘가에 갇혀 시간을 손가락으로 겨우겨우 헤아리는 기분이 들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길어서 손가락을 접어가며 시간을 세는 일은 너무 헷갈리고 그래서 긴 시간은 때로 터무니없이 짧게, 혹은 그 반대로 느껴지더라.

알코올도 수면제 성분이 있는 항우울제도 힘을 못 쓰는 밤. 또렷한 것은 내 정신과 허기. 허기가 날 또렷하게 하는 걸까, 또렷하기에 내가 허기를 생생하게 느끼는 걸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무언가를 먹기엔 이 텅 빈 느낌이 불편한 한편으로 명징한 내 정신이 반가워서 공연히 누워있거나 책을 읽으며 비어 있는 상태를 즐기기도 해.


우리가 맞지 못한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기분이 이상하다. 세상엔 이상한 일이 너무 많더라. 그래서 슬펐어. 이런 이상한 삶 같은 거 도대체 왜 발명했을까 골몰하기도 했어. 너 없이 보내고 지낸 시간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어. 너는 아마 믿지 못하겠지만, 허기와 외로움을 달래려고 그랬고 나를 파괴할 자유를 누리기도 했어. 결국 엉망이 되어버렸지만. 나는 아직도 네가 나에게 헤어지자고 했던 이유가 궁금해서 가끔은 하루를 써서 고민을 해. 그래봤자 너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겠지만. 또 뻔한 말을 반복하겠지만.


나는 완전히 무너지고 싶은 마음과 무너지지 않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늘 골몰하다가 느릿하게 허물어져. 이도 저도 아니게. 이도 저도 아니라는 거 정말 괴롭지 않니. 끔찍한 거 같아. 이것도 저것도 아닌 거. 무엇도 되지 못한 거.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글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무엇도 아니라는 것일 테니, 내가 무엇이 될 수는 있을까. 그런 위로 같은 거 이제는 믿지도 않아.

네게 푸념하거나 우울한 이야기를 털어놓고자 한 것은 아니었어. 너는 이제 나의 에디도 애슐리도 아니지만, 아직도 너와 내가 가로질렀던 겨울의 한복판을 떠올려. 3층 이상으로 쌓지 않아 찬바람이 어디서든 들이치던 그 겨울의 마을. 바람결에 할퀴어져 아릿해진 두 뺨을 비빌 때면 피어나는 온기들. 입술 사이로 네가 피우는 에쎄 담배 연기처럼 하얗게 피어오르는 숨. 그렇게 너를 따라 하는 나. 뭐든 따라 하고 네가 되고 싶었던 나. 그리고 네가 사랑하는 내가 되고 싶었던 나 같은 것들.


첫사랑이 영영 안 잊힌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너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겠지. 나는 이제 네 목소리도 얼굴도 마주 비비던 코끝의 감촉도 거의 잊어버렸는데, 너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 세상에는 많고, 나는 그중에 이게 가장 이상하다고 믿는다. 몇 년 전의 네가 형체도 없이 실체도 없이 마음에 남아있는 이 상황을.

너는 나쁜 사람이었다고 매도하다가 나중에는 아주 아파서 너를 너무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어. 너를 못된 사람으로 만들수록 내가 너를 사랑했다는 진실이 명징해지는 것은 너무 이상한 일이지. 이딴 게 사랑이라니.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 우연히 길을 걷다 너를 만나는 상상. 여기 이 세상 어딘가에 넌 있겠지. 내가 어플을 돌리다가 네 프로필을 발견했을 때처럼, 넌 결국 다시 발견될 테지. 그때 나는 네게 다시 연락할 용기가 날까. 그리고 그 모든 고민과 망설임은 의미가 있을까. 너는 이미 떠났는데. 한참 전에.


안녕 잘 있어

다이어리는 다 쓰지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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