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에게,

by 재원

온에게.


당신 글을 읽었어요. 일기도. 소름끼치려나요. 그렇겠죠. 그날 이후론 완성되기 전까진 내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으려던 당신이니까요. 그 말이 우리를 이렇게 바꿔놓은 거잖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을 한 걸 후회하진 않아요.


당신 딸을 만났어요. 당신 딸은 잘 먹지 못해요. 당신이 썼던 거랑 다르게. 매일 토하고, 벽을 두드리고, 가슴을 치며 우는 소리가 다세대주택 특유의 얇은 벽 너머에서 전해져요. 기이하게 나는 그 애가 토하는 소리를 들으며 밥을 삼킵니다. 마치 내가 무언가를 먹으면, 그 애에게 전달이라도 될 줄 아는 사람처럼, 우리가 탯줄로 이어져있다고 믿는 것처럼.


일기를 그 애에게 전해주었어요. 그 애는 당신이 내 수업에 처음 찾아왔을 때처럼 눈을 빛냈는데, 그게 형광등 불빛 때문이었는지 그 애가 가진 총명함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 나라면 열망 정도로, 당신이라면 형광등 빛 정도로 치환했을 빛남이었겠죠. 혹은 언급도 하지 않고 넘어갈 무언가였을 거예요. 그런데 난 넘어가지 않았어요. 그걸 끝까지 내 눈에 담았어요. 끝까지. 당신이 나를 보는 듯이, 아주 오래 천천히 보고 마주하고 곱씹었습니다.


이 문장을 사랑하시죠, 선생님. 속일 생각은 말라는 둥 연륜이 있다는 둥 당신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죠. 활달하고 염치 모르는 듯한 얼굴을 하려고 애쓰며. 그저 이루지 못한 꿈의 끝자락이라도 잡아채려고, 혹은 무료한 시간을 때우려고 문화센터에 들어온 노인처럼 보였다고 내가 얘기했죠. 당신은 웃었고요. 그때 나는 몰랐고 그래서 동성애가 등장하는 소설 같은 걸 들이밀면서 토론 거리라는 듯 말했죠. 오스카 와일드. 아르튀르 랭보 같은 이름을 말하면서. 참 진부한 이름들이잖아요. 당신은 코웃음도 치지 않고 내가 가져온 글들을 꼼꼼히 읽어 내려가서는 매시간 토론 때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그때 딱 한 번 입을 열었죠. 무슨 의미가 있나요? 나는 그때 이 모든 게 나에게 무슨 의미라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당신 딸은 이미 알고 있어요. 나는 숨긴다고 숨겨본 것을, 당신이 모르는 체한다고 모르는 체했던 것을 당신의 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어요. 우리는 당신을 사랑해요. 그 애도 부정하고 당신도 부정하는 것. 난 엄마를 사랑하지 않아요. 선생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렇게.


있잖아요, 작가들이란 평생 한 가지 주제, 한 가지 사건을 변주해요. 그 순간에서 벗어나질 못하니까. 당신도 그런 순간이 있었나요. 아이를 체중계 위에 올릴 때 그랬나요, 아이를 위해 밥을 지을 때 그러했나요, 아니면 글을 쓸 때, 아니면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온, 다 괜찮아지는 일 따윈 없어요. 당신이 그랬죠. 공황발작으로 세상으로부터 유리되어 쉬어지지 않는 숨을 억지로 붙드는 나를 보고 그랬잖아요. 다 괜찮아질 거라고. 다 괜찮아지는 일은 없어요. 그런 일 같은 건 없어요, 온.


생은 끝났는데, 소설이 끝나지 않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결말이 나지 않았는데, 멋대로 인물이 죽어버렸다면 어떻게 하나요. 더는 이야기를 끌어갈 사람이 없는데, 사람이 어떤 결말을 맞아도 계속 누군가의 생이 이어지고 있어요. 소설처럼 끝나질 않아요. 결말이 났는데,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요. 그건 아니잖아요, 소설의 원칙을 해치는 거잖아요. 그런 게 어떻게 소설일 수가 있어요. 삶일 수가 있냐고요.

이렇게 쓸 수밖에 없어요. 그 애가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그 애가 말하는 당신은 너무 아득하고, 다른 사람 같아요. 당신은 이미 죽었는데,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네요. 당신이 쓰던 글을 마무리 짓는다고 해서 이 이야기가 끝나긴 할까요.


재능 없는 자들은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이도 저도 아닌 채로 살게 돼요.


온, 내게 그렇게 말했죠. 선생님은 무럭무럭 자라겠지만,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요. 그래서 돌아왔다고요. 자신이 없어서 결국 발을 질질 끌며 현관으로 돌아와서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남편이 화내고 딸이 울며 자신을 찾길 기다렸다고. 그러나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고. 그래서 가출은 그렇게 시시하게 끝나버렸다고.


당신이 그랬잖아요. 그렇게 쓸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있는 거라고. 그리고 그 아이는 평생 그 장면을 변주하며 살아가겠죠.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아직도 믿을 수 없는 건, 당신 역시 누군가에게 평생 그렇게 쓸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남기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사람이라는 것.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렇게 자신을 남길 수밖에 없네요. 슬프게도.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 글을 더는 만들고 싶지 않은데, 우리는 계속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결말 같은 건 모릅니다. 주인공은 죽었고, 결말에 도달하기 전에 주인공은 끝났으니까요. 이제 주인공을 잃은 인물들만이 무대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해진 동기조차 없습니다. 내 몸을 미워하지 않아도 되고, 내 글을 끔찍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자유롭지 않아요. 무엇 하나 나를 막지 않으나 자유롭지 않아요.


온, 모두 다 괜찮아지는 일 따윈 없어요.


온, 우리는 괜찮지 않아요.


온, 정말이지, 아무것도 괜찮지 않아요.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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