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꿈을 꿀 수 있음에 감사해
고등학교 졸업을 마치고 대학교 입학까지 시간이 남아돌았을 때, 우연히 아토즈 채널에 올라온 청춘유리 작가의 인터뷰 영상을 접하게 되었다. “여자 혼자서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돈 벌어서 왜 노는 데 쓰냐”라고 말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치열하게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번 돈으로 8년 동안 50개국을 여행했다는 그녀의 용기가 부러웠다. 세계여행을 떠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을지, 어떤 마음으로 여행자가 되었을지 생각이 들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도, 우울의 늪에 빠졌던 어느 새벽 작은 방 안에서도, 군대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도 그 영상을 수십 번 돌려봤다. 하지만 시중에 돈이 없다는 핑계로 “종강하면 떠나야지, 졸업하면 떠나야지”하며 계속 꿈을 미루기에 급급했다. 그로부터 3년이 흘렀고, 나는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남들처럼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남들처럼 21살에 입대했으며, 남들처럼 대충 안일한 마음으로 군생활을 보내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입대하고 나니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평소에도 손재주가 없던 나는 기계나 물건을 다루는 일이 어려웠다. 훈련소에서 총기 분해와 수류탄 던지는 방법을 배울 때 옆에 있던 동기들은 한 번만 설명해줘도 척척 잘 해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점점 자신감을 잃게 되었고, 주목받거나 나서는 일을 기피하게 되었다. “어차피 나는 아무것도 못하는데. 나라는 존재가 도움이 되기야 하겠어” 점점 머릿속은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 찼고, 화장실에서 혼자 눈물을 삭히는 날이 많아졌다. 시간이 지나 자대를 배치받게 되면서 사람을 좋아하는 내가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되었고, 항상 밝게 웃던 나는 점점 표정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일정한 거리가 필요한 나에게 불편한 사람과 24시간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건 며칠이 지나도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결국 상담관님의 권유로 정신과 진료를 받게 되었다. 간부님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는데 도저히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잘못한 사람처럼 고개 숙여 땅바닥 무늬만 보았다. 한 5분이 지났나. 데스크에 앉아있던 간호사님이 초진이면 설문지를 작성해야 한다고 했다. 설문지에는 현재 상태와 가장 근접한 숫자를 고른 뒤 합산해서 합계란에 적으면 된다고 하셨다. 설문 사항에 모두 체크한 뒤 숫자를 더하려는데 자꾸 까먹는 거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세다가 또 까먹고. 또 세고. 또 잊고. 나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가 되었구나. 쪽팔린 눈물을 휴지로 급하게 닦고 구겨서 주머니 안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진료 순서가 다가와 똑똑 두드리고 문을 열자 폐쇄 병동처럼 온통 칙칙한 벽과 소리 한 점 없는 고요함을 느꼈다. 의사는 탁탁 – 키보드 자판기를 요란하게 치고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가볍게 인사를 건넸지만 의사는 컴퓨터 화면에만 시선이 쏠려있었다. 대화를 이어가는데 내 눈동자를 바라보지 않으니 존중받지 못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약물 치료를 권하며 3주 치 약을 처방해 줬다. 진료는 5분 만에 끝났다.
어두컴컴한 도서관 창가에 앉아 허망하게 바라봤던 하늘을 아직도 기억한다. 파랗고 눈부신 하늘이었지. 둥둥 자유로이 떠다니는 구름에 질투가 났었나. 그 순간 크나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는 전역하고 무조건 세계여행을 떠나야겠다. 그러니 이 1년 6개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자”라고 스스로와 약속했다. 2년 전, 홀로 37일 동안 유럽 여행을 떠났을 때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마주친 사람들에게 혼자 여행 중이라고 하니 “아, 나도 어렸을 적에 그게 꿈이었는데. 나도 도전해보고 싶었는데. 세상이 넓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아서 후회된다”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깨달은 건, ‘지금이 아니면 못하는구나’였다. 그러면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하니 삶의 방향성이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나의 최종 목표는 ”1년 동안 세계여행을 떠나 그 이야기를 책으로 출판하는 것“이였다. 그래서 매일 기상하고 출정식 집합 전에, 저녁 뉴스 시간에, 1시간 남짓한 점심시간에, 개인 정비 시간에, 취침 후 연등 시간까지 사용해 총 150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그때 안시내 작가의 《악당은 아니지만 지구정복》 여행 에세이를 읽게 되었는데 350만 원으로 141일 동안 세계여행에 떠난 어느 한 대학생의 이야기이다. “1년 동안 내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하자”라는 신념으로 대학교 휴학계를 내고, 낮에는 카페 알바, 점심에는 피시방 알바, 저녁에는 베이비시터 알바를 전전하며 여행 경비를 벌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암이 재발해 치료비를 드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꿈을 포기할 수는 없어 남은 350만 원으로 141일간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 네팔, 모로코, 스페인을 여행했다. 그 용기가 대견했다. 남들이 뭐라 하든 당당하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이 부러웠다. 내가 생각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것들을 그녀는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네가 가진 용기를 너만의 것으로 만들어 봐. 나는 지금 그러고 있다고, 지금 이 순간에 미치고 있다고.”그렇게 내게 속삭여주는 듯했다.
나를 일어서게 한 도서관 창가 자리에서, 책을 읽으며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꿈을 꾸었다. 부대에서 독후감 경연 대회에 참여해 대대장님 표창을 받았고, 총 50편의 독후감과 일기를 썼다. 야나두와 시원스쿨에서 결제한 영어 회화와 스페인어 회화 강의를 매일 30분씩 꾸준히 공부했다. 또 미션캠프에서 주관한 하루에 한 번 메일로 보내주는 단어로 1,000자 이내 글을 30일 동안 작성하는 작은 프로젝트에 참여해 세상에 한 권밖에 없는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면 나는》 책도 출판했다.
물론 의지가 꺾이는 순간도 있었다. ’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 스스로에게 확신이 서지 않았을 때는 “내 꿈을 그냥 꿈으로만 두지 마”라고 수십 번 되뇌었다. 그리고 다이소에서 천 원 주고 산 모조지를 펼쳐 유성 매직으로 버킷리스트 100가지를 적었다. 파키스탄 훈자 마을 가보기. 세계여행 다녀온 이야기로 강연하기,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맥주 한 잔 하기. 튀르키예 카파도키아에서 열기구 타보기, 네팔 히말라야 등산하기, 세상의 끝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에서 내 집으로 편지 보내기. 버킷리스트를 적고 나니 100가지 중 절반이 여행과 관련된 것이라 이것을 꼭 이루고 말겠다는 의지가 생겨났다.
틈틈이 주말 외출과 외박을 사용해 세계여행을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경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필요한 물품 대부분은 다이소에서 택배로 주문했고, 휴가를 나갈 때는 대학 병원과 보건소에 들러 예방 접종을 맞고, 증명사진을 찍어 비자에 필요한 서류들을 출력했다. 세계여행의 첫 시작지는 호주 시드니로 정했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호주에 대한 동경심이 컸었다. 한 나라가 대륙이라는 사실이 놀라웠고, 감옥이 포화 상태였던 영국이 죄수들을 유배지로 삼은 곳이 외딴 호주였다는 역사가 흥미로웠다. 마침 항공권을 찾아보니 직항 가격이 34만 원. 호주를 선택을 안 할 이유가 없었다.
나에게 항상 겁을 주었던 사람은 지인도 친구도 아닌 가족이었다. 2년 전, 혼자 홍콩 여행을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누나는 “내가 아는 사람이 홍콩에서 장기 매매 당했대, 그런 위험한 데를 왜 가?‘라고 했다. 그리고 3개월 뒤 떠난 유럽 여행에서도 “어떻게 혼자 한 달 동안 여행을 할 수가 있냐. 당장 취소해라”라고 했다. 이런 싸늘한 반응에 자신감이 위축되기도 했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처음으로 해보고 싶은 게 생겼는데 한 순간의 두려움으로 여행을 포기한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내 결정을 번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밀어붙였다.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펜을 들어 편지를 썼다. “엄마, 나 너무 지쳤어. 세상과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싶어. 군대에서 살아갈 힘을 잃었을 때, 수없이 넓은 세상의 땅을 밟으며 눈물을 쏟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버텼어.”라고 적으니 조심히 다녀오라고 하셨다.
나는 군대에서 3개월 동안 기관총 사수로 복무하다 부적응으로 인해 행정병으로 보직을 변경했다. 행정병으로 임무를 수행하면서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배우게 되었다. 초반에는 일이 능숙하지 않아 잦은 실수로 인해 꾸중을 들었다. 그 이후 모르는 게 있으면 바로 여쭤보고, 한글과 엑셀을 공부하고, 까먹지 않기 위해 중요한 내용은 메모장에다 적거나 책상에 있는 캘린더에 펜으로 표시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에 익숙해져 무슨 일이 생겨도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고생하시는 간부님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놓치고 계신 부분들을 콕 집어 드리거나, 부대에 필요한 양식 파일을 만들고, 전입 온 신병들의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해 놓고, 용사 외출, 외박, 휴가 간의 특이사항이 생기면 즉각적으로 각 소대 간부님들께 보고를 드렸다.
만약 행정보급관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보급관님께서는 매번 실수로 인해 어두운 표정으로 자책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시고는 “진구야. 날도 좋은데 드라이브나 하러 갈까?”라고 하셨다. 차를 타고 부대에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 대기 문구로 향하고 있을 때 내게 “네가 멍청했으면 행정병으로 뽑았겠니, 누구나 처음에는 실수를 하니까 너무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구보다 더 열심히 해서 보급관님께 인정을 받고 싶었다. 보급관님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다른 간부님이나 민간인 분이 행정반에 오셨을 때 친절하게 맞이했고, 용사들이 휴가나 부대 일정, 지시 사항 관련해서 질문을 하면 내가 아는 선에서 알려주기 위해 노력했다.
전역하기 하루 전에 마지막 식사 추진을 마치고 보급관님께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 혹시 시간 괜찮으시냐”고 여쭤봤다. 그러니 내 어깨를 꽉 붙잡으시면서 “그래, 우리 이야기할 게 참 많지”하며 밖으로 나와 경치 좋은 밴치에 앉았다. 나는 수줍게 편지를 건네며 “보급관님 덕분에 정말 많이 배울 수 있었고, 누구보다 잘 챙겨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군 생활 하면서 고맙다는 말보다는 죄송하다는 말을 더 많이 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든다”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시고는 “23년 동안 군 생활을 하면서 많은 병사들과 일을 했는데 그중 네가 Top 3 안에 들어갔어. 지금까지 고생했고 잘했다”라고 해주셨다. 정말 눈물이 쏟아지며 서럽게 울었다. 그 말은 보급관님께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나는 호주를 시작으로 인도네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네팔, 인도, 파키스탄, 아랍에미리트, 오만, 요르단, 이스라엘, 이집트, 아제르바이잔, 튀르키예, 그리스, 이탈리아, 튀니지, 모로코,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까지 세계일주에 도전하려고 한다. 1년 6개월 동안 악착 같이 모은 2000만 원을 들고 대한민국 국기와 내 이름이 새겨진 명찰을 클립으로 꽂은 중고로 7만 원 주고 산 50L 킬리 배낭을 메고,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에게 “What is your happiness?”라고 쓰여 있는 공책을 건네 추상적인 행복의 의미를 찾아가려 한다.
헤어지기 직전에 인천 공항까지 배웅해 준 아빠를 안았다. 당분간 열리지 않을 어둡고 텅 빈 내 방을 수백 번 넘게 들락날락할 아빠의 마음을 감히 상상하며.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기약 없는 여행에서 반짝이는 나의 눈에 얼마나 많은 세상이 담길까. 정말 오래도 걸렸네. 밤이 걷히어도 내일이 온 적 없던 내 비워 둔 달력에 이제야 할 일이 생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