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행복이 궁금했습니다.

시드니에서 배운 다정함

by 공진구
인천 공항 게이트 앞에서 찍은 사진. 얼마나 심장이 떨렸는지

11시간의 긴 비행을 마치고 시드니에 입국했다. 호주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전자 비자 신청과 세관 신고서를 필수로 작성해야 한다. 한국인이라면 주의 깊게 봐야 하는 사항이 있는데 바로 라면, 햇반, 육류가 함유되어있는 식품과 의약품을 챙겨 왔는지 여부를 체크해야 한다. 만약 자진 신고하지 않고 입국했다가 발각되면 무려 300만 원이 넘는 벌금을 부과해야 하니 조심해야 한다.


입국 심사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메모장에 적었다

나는 짐을 최소화하기 위해 식품은 안 챙겼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비상용 의약품을 챙겼다. 그래서 조금 걱정이 들어 메모장에다 영어로 약 리스트를 직원에게 보여드렸다. 직원은 house hold medicine 단어를 보시고는 한국어로 “안녕하세요!”하며 지나가도 된다고 손짓을 하셨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도중에 친숙한 영어가 사방에서 들렸다. 눈앞에 보이는 각종 안내판과 상점 간판에 쓰여있는 영어를 한 번씩 소리 내어 따라 읽었다.

내가 지금 서울이 아닌 시드니라니!

숙소로 향하는 길을 찾기 위해 구글맵 위치를 켜보니 내가 지금 호주라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반팔과 반바지를 입어도 선선한 날씨, 한국과는 다른 버스의 색깔, 형광색 조끼를 입고 도로를 누비는 우버 이츠 배달 기사, 빈티지 스타일로 멀끔하게 차려입은 호주 현지인들.


숙소는 가장 저렴한 호스텔로 시내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스탠모어 역 근처에 있었는데, 동네가 한적하고 거리를 둘러보면 나무와 공원들이 잘 가꾸어져 있었고, 유치원과 초등학교가 옆에 붙어 있어 운동장에서 수업하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숙소에서 체크인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니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배낭은 침대 기둥 사이로 와이어를 연결해 자물쇠로 잠근 뒤 밥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베트남 쌀국수 15,000원

대충 구글맵에서 후기가 좋은 베트남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쌀국수 1인분이 15,000원인 것을 보고 호주 물가가 비싸다는 것을 체감했다. 얼큰한 국물과 쫄깃쫄깃한 면의 식감 때문인지 후루룩 넘어갔고, 고기가 질기지 않아 맛있게 먹었다.

캠퍼스가 너무 예뻤던 시드니 대학교

식당 근처에 시드니 대학교가 있어서 산책하러 향했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량한 하늘. 햇빛이 쨍쨍했지만 기분 좋은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니 괜스레 미소가 나왔다. 캠퍼스 안에는 백인, 흑인, 동양인 등 정말 다양한 인종이 있었다. 그들은 여느 학생과 같이 가방을 메고, 헤드셋이나 이어폰을 꽂으며 걷거나 운동장에 누워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축구를 즐기고 있었다. 단일 민족 국가인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라 더욱 인상 깊었다.


https://youtu.be/IwzF26o0AuU?si=P2W7uvMlKDtr9b0w

최근에 큰 이슈였던 캣츠아이 Gap 광고

최근에 캣츠아이가 참여한 Gap 광고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영상에는 여러 인종들이 똑같은 청바지를 입고 춤을 추며 조화를 이루는데 “청바지는 누구나, 자신의 개성대로 멋지게 입을 수 있다”브랜드 방향성이 짧은 1분 30초에 담겨 있었다. 그래서일까. 한 대학교에 피부색, 언어,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섞여있는 이 낯선 광경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1850년에 설립된 호주 최초의 대학교인 시드니 대학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학 캠퍼스 10위 안에 든다고 한다. 해리포터 속 호그와트와 유사한 건축물 때문에 방문하게 되었는데, 복도 창틀에 걸터앉아 푸릇푸릇한 잔디밭과 쿼드랭글 시계탑이 보이는 곳이 유명하다.

사진 포즈는 늘 어렵다

나는 앞에 계신 한국인 분께 부탁해 창틀에 발을 쭉 뻗고 기대는 자세와 그늘진 잔디밭에서 시계탑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낯선 사람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게 부끄러워 망설이는 나를 향해 한국인 분은 조금만 왼쪽으로 가면 예쁠 것 같다고,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 포즈 어떠냐고 실시간으로 자세를 교정해 주셨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사진첩을 확인해 보니 100장이 넘게 찍혀 있었다. 찰칵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한국인의 뜨거운 열정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시드니 빅토리아 파크에 누워있는 사람들

지도를 보지 않고 내키는 대로 방랑하다 우연히 빅토리아 공원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도심 한가운데에 이렇게 넓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니. 햇살이 내리쬐는 푸른 하늘 아래에서 사람들은 돗자리 없이 들판에 누워 책을 읽거나 사랑하는 연인과 오순도순 마칠 생각이 없는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목줄을 풀고 강아지와 산책을 하는 견주, 혼자 노트에 끄적끄적 무언가를 쓰고 있는 학생…

이곳에서 글을 썼던 순간

그 속에서 적당히 그늘진 곳에 자리를 잡아 메고 있던 가방을 베개 삼아 누워 헤드셋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이게 진정한 “쉼”이라는 거구나.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것. 혼자 있을 수 있고 매일매일이 새로울 수 있다는 것. 누군가의 연락에 조마조마하지 않아도 되고 오직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 나는 지금 자유롭구나.


문득 1년 전에 군대에서 허망하게 바라보았던 그 하늘이 떠올랐다. 나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나. 하루를 버티는 것조차 버거웠던 나. 아침이 되면 영원히 눈이 떠지지 않았으면 했다. 비몽사몽인 상태로 일어나 실외 점호에 나가 도통 의미를 알 수 없는 구호를 실컷 외치다 보면 아침 식사 시간이 다가온다. 억지로 살기 위해 맛없는 밥을 욱여 삼키고 피곤한 몸으로 군복을 갈아입은 뒤 행정반에서 업무를 시작한다.


영혼 없이 마우스와 키보드를 이리저리 만진다. 나보다 적으면 5살 많으면 20살까지 차이가 나는 이곳에서 경쟁력이 없는 사회의 일원 중 한 명으로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다. 평상시와 보잘것없던 날,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 순간 계속 시계 초침만 째려보는 나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내일도, 심지어 먼 미래인 전역날 까지도 똑같이 컴퓨터 앞에서 퇴근 시간만 기다릴 것 같은 내 모습이 초라해 보였다. 분명 만화 속 청춘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내 청춘은 왜 이러는 걸까 비교하며 자책했다.

내가 좋아하는 안시내 작가의 <악당은 아니지만 지구정복> 일부.

그럴 때마다 책을 읽었다. 여행 에세이를 펼치는 순간 나는 30L 배낭을 등에 싣고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환호에 취하고, 고요한 새벽,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서 누워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휴대폰 녹음기를 켜 지금의 감정을 거짓 없이 토해내게 되었다. 조지아 메스티아 산 정상에서 광활한 자연을 보곤 경견해지고, 파키스탄 훈자에서 숨이 멎을 정도로 웅장한 카라코람 산맥을 보곤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곳이 존재했구나” 상상할 수 있었다.

자신의 행복이 무엇인지 적는 모습

그 순간 이곳을 스치는 사람들의 인생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 분홍색 후드티를 걸치고 노트북으로 과제를 하고 계시는 일본인 유학생분께 “당신의 행복이 무엇인지 여기 노트에 적어줄 수 있나요?”물었다. 그러자 이런 적은 처음이라며 당황한 듯 잠시 머뭇거리시더니 무언가 떠올랐는지 펜을 잡으셨다. 그녀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과 친구들과 악기 연주를 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적었다.

강아지가 너무 귀엽게 생겼다

그리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강아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견주 분께도 공책을 건네 행복이 무엇인지 물었다. 글을 쓰는 중간중간마다 강아지를 바라보며 해맑게 웃음을 짓는 견주 분의 표정에서 행복이 느껴졌다. 공원에서 강아지와 함께 놀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친구와 가족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마시는 것이라고 적었다.

공책을 가지고 노는 아이의 모습

기분 좋은 햇살을 맞으며 돗자리에 앉아 아이와 놀고 있는 어머니께도 행복에 대해 물었다. 아기는 회색 양말과 초록 바지, 하늘색 벙거지 모자와 회색 뜨개니트를 걸치고 있었다. 어머니가 글을 쓰시는 동안 아이는 돗자리에 있는 휴대폰 장난감과 동물 인형, 물티슈를 마구 매만지다 내 공책을 보곤 흥미가 생겼는지 손바닥으로 세게 치고 아담한 한 손으로 펜을 꼭 잡았다. 우뚝 솟은 콧불, 초롱초롱한 눈동자, 입을 헤벌쭉 내밀며 엄마를 쳐다봤다. 어머니는 오후에 아들 거스와 공원에서 함께 놀고 있을 때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내게 “이거 정말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아요”칭찬해 주시고 작별 인사를 건네셨다.

이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공책이 되었다

처음 모르는 이에게 행복을 묻는 일은 두렵고 무서웠다. 혹시라도 거절하면 어떡하지, 어눌한 영어를 못 알아들으시면 어떡하지 했다. 하지만 눈 한 번 감고 용기를 내보니 사람들은 친절하게 내 말을 경청해 주시며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뭐든지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건데 그동안 갖갖은 핑계를 대며 나중으로 미뤘던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여행은 두려움을 넘어서는 연습이다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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