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천국에 온 거지

있잖아, 나는 처음으로 내일이 막 궁금해져

by 공진구
처음 마주한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간에 숙소를 나와 스탠모어에서 버스를 타고 루나 파크로 향했다. 하버 브리지를 건너던 중, 창밖으로 오페라 하우스가 눈에 들어왔다. 감히 말하건대, 그 순간의 풍경은 압도적이었다.


‘내가 살면서 오페라 하우스를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순간 가슴이 벅차올라 당장 버스에서 뛰처내리고 싶었다. 바다 한가운데에 조개껍질처럼 정교하고 우아한 형태를 지닌 이 건축물은 마치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는 하얀 돛처럼 보였다.

정말 경이로웠던 순간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사진을 안 찍을 수 있을까. 바로 곁에 있던 일본인 분께 부탁해 한 장을 남겼다. 오페라하우스를 중심으로 수많은 빌딩들이 하늘로 치솟아 있었고, 구름도 신이 난 듯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주변을 돌아보니 사람들은 밴치에 앉아 쉬거나, 숨을 몰아쉬며 달리거나, 접이식 의자에 앉아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루나 파크 입구

설렘을 안고 루나 파크 입구에 도착했다. 커다란 웃는 얼굴이 중앙에 자리하고, 그 양옆으로는 두 개의 탑이 서 있었다. 얼굴은 진한 홍조를 띠고 눈을 치켜세운 채, 우스꽝스럽게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구름 위룰 자세히 보면 원주민 국기가 보인다

북적이는 인파 속으로 들어가 서둘러 사진을 찍은 뒤, 뒤돌아보니 하버 브리지 꼭대기에서 원주민 국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영국 식민지 시절 빼앗긴 땅과 차별, 학살의 역사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호주 사회의 태도가 멋지게 느껴졌다.

페리 티켓. 기념품으로 소장중

시드니의 대중교통에는 요금 상한제가 있다. 평일에는 최대 19.30달러, 주말에는 9.65달러를 넘지 않는다. 다행히도 이날은 토요일이었다. 페리 요금은 9.20달러. 나는 선착장에서 서큘러 키로 향하는 페리에 올랐다. 배가 서서히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눈앞에 오페라 하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디자인을 바라보며 나는 순간 꿈을 꾸는 건 아닌가 싶어 눈을 비볐다.


1958년, 덴마크 건축가 욘 우존이 설계한 오페라 하우스의 디자인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특히 지붕을 짓는 데만 무려 8년이 걸리면서 공사 기간은 계획보다 10년 이상 지연되고 예산도 크게 초과됐다. 결국 “국민 세금 낭비”라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렇게 논란의 중심에 섰던 건축물은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며 오늘날 시드니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내가 시드나 사진 중 가장 좋아하는 사진

와, 인간의 창의성이란 정말 무한하구나.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휘날리며, 윤슬이 반짝이는 바다를 향해 손을 뻗으니 새로 태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너무나도 아름다운 광경이야. 그래, 어쩌면 나는 죽은 것 같아. 방금 죽은 것 같아. 그래서 천국에 온 거지.

테라스에서 엄지척을 날리는 아저씨들

서큘러 키는 바다와 도시가 맞닿은 곳으로, 늘 하버 브리지와 오페라 하우스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페리에서 내린 뒤, 나는 구글맵을 켜지 않고 발길이 이끄는 대로 걸었다. 휴대폰으로 하늘을 유영하는 구름을 찍고 있는데, 근처 카페테라스에서 형광 초록색 작업복을 입은 호주 아저씨들이 단체로 엄지 척을 해주셨다. 나도 웃으며 감사 인사를 건네자, 그중 한 분이 “혼자 왔냐, 사진 찍어줄까?” 하시더니 내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그런데 사진을 찍다 말고 갑자기 어디론가 뛰어가는 게 아닌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웃기만 하고 서있었는데, 잠시 후 아저씨가 다시 돌아와 “한 번 장난 좀 쳐봤다”며 웃으며 휴대폰을 돌려주셨다.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

얼떨떨했던 것도 잠시, 혼잡한 번화가를 벗어나 도심에 들어서자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현대식 고층 빌딩들이 빽빽이 들어선 사이로, 햇빛에 그늘진 고풍스러운 갈색 석조 건물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순간 ‘내가 지금 뉴욕에 온 건가?’ 하는 착각이 들 만큼, 서큘러 키는 마치 세계의 중심처럼 느껴졌다.

가방에서 헤드셋을 꺼내 좋아하는 노래, Sombr의 〈I Wish I Knew How to Quit You〉를 재생했다. 거리에는 수십 개의 언어가 뒤섞여 들렸고, 정장을 입은 호주인들이 커피를 손에 든 채 바쁜 걸음으로 지나갔다. 곳곳에서는 관광객들의 웃음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치킨 너겟 4조각 23,000원

아침을 거른 탓에 배가 고파 근처 Belles Hot Chicken에 들어가 23,000원짜리 치킨 텐더 세트를 주문했다. 치킨 위에는 피클이 올려져 있었고, 곁에는 양념이 묻은 감자튀김이 놓여 있었다. 갓 튀긴 치킨은 껍질이 바삭하고 속살은 부드러웠으며, 매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정교하게 균형이 잡혀 있는 오페라 옆면

그리고 마침내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보러 갔다. 입구에 다다르자, 도저히 인간이 만든 것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압도적인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계단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위를 올려다보니 정교하고 규칙적인 모형들이 장엄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오페라 하우스 중심으로 천천히 한 바퀴 돌아봤는데, 하버 브리지가 보이는 밴치에 앉아 잡담을 나누시는 노부부와 튼튼한 울타리에 몸을 기대 장난을 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낮인데도 사람이 엄청 많았다

사진을 찍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맥주나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가까스로 빈자리를 찾아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오페라 하우스를 오랫동안 바라봤다. 군대에서 버킷리스트를 작성할 때만 해도 그 목록이 변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시드니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직접 오페라 하우스를 마주하게 될 줄이야. 보면 볼수록 아름다워 미소가 멈추지 않았다. 내 58번 버킷리스트 -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보기 달성! -

다음날, 주말 교통비 상한선이 9.60 달러인 덕분에 시드니에서 한 시간 거리의 맨리 비치로 향했다. 맨리 비치는 본다이 비치보다 한적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로 관광객보다 현지인들이 더 많이 찾는 곳이다. 또 서핑 명소로 유명해 주변에 서핑 스쿨도 여러 자리하고 있었다.

기계에서 티켓을 뽑아 페리에 올랐다. 잠시 후 요란한 경적 소리와 함께 배가 출발했다. 실내 좌석도 있었지만, 바깥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야외 자리에 앉았다. 뒷좌석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니, 하버 브리지와 오페라 하우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할머니들, 손을 잡은 채 평온한 시간을 보내는 연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난간에 손을 올리고 황홀한 눈빛으로 풍경을 바라보던 한 아이의 모습이었다.

그 순수함에 나도 모르게 이끌려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아이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나는 다가가 “너 정말 행복해 보인다 “ 말하자 방긋 웃었다. 옆에 있던 아버님께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왔다고 말씀해 주셨고, 아이의 이름도 알려 주셨지만 발음이 어려워 알아듣지 못했다. 자기 이야기가 오가는 줄도 모른 채 계속 풍경을 바라보는 저 작은 아이에게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헤드셋을 쓰고 볼륨을 최대로 높인 채 The 1975의 음악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이렇게 단순한 것들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인데 왜 군 생활 중에는 그러지 못했을까. 여행을 하면서 깨달은 건 행복은 ‘취업에 성공하면’, ‘전역하면’, ‘대학교에 합격하면’ 찾아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평소에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언제나 행복하고, 일상 속에서 불안과 불행에 갇혀 있다면 아무리 원하는 걸 이뤘다 해도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가진 것들에 감사할 줄 몰랐던 것 같다. “군대에서는 행복할 수 없어”라고 멋대로 단정 지으며, 행복을 마치 손이 닿지 않는 거대한 무언가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돌아보면, 혼자 책을 읽던 시간도, 날씨 좋은 날 부대 주변을 산책하던 순간도, 주말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던 여유도 모두 행복이었다. PX에서 좋아하는 음식을 마음껏 사 먹던 일, 도서관에서 영어와 스페인어를 공부하던 시간, 취사장 가는 길에 만난 길고양이와 장난치던 순간까지… 그 모든 평범한 일들이 사실은 이미 행복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비치볼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

맨리 선착장에서 내려 약 10분 걸으니 맨리 비치에 도착했다. 해변 뒤편에는 길게 이어진 산책로가 있었고, 사람들은 푸르고 맑은 바다에서 서핑을 즐기거나 친구들과 비치볼을 하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목적 없이 산책을 이어가다가 문득 뒤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니 “I’m done hidin’, now I’m shinin’”이라는 가사가 들려왔다. 유치원 모자를 쓴 아이들이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Golden〉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너희가 부르는 노래 케이팝 데몬 헌터스 맞지?”라고 묻자 아이들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민국에서 8,000km나 떨어진 시드니에서 한국 음악을 따라 부르는 아이들을 보니 새삼 문화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이 났다.

맨리 비치에서 발길이 닿는 대로 무작정 걸었다. 신발에 모래가 들어가도, 바지가 물에 흠뻑 젖어도 개의치 않았다. 그저 걸음을 옮기는데 왠지 모를 해방감이 들었다. 군대에서는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통제를 받다 보니 누군가의 조종 아래 움직이는 기계 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 누구의 지시에 따를 필요도, 복장에 간섭받을 이유도 없으니 마음이 편안했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만으로도 행복은 충분했다.

노을이 저무는 시간, 서큘러 퀘이로 향하는 페리에 올랐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야외 좌석에 앉았지만, 밤공기가 스칠 때마다 제법 쌀쌀했다. 7개월 전, 중국 상하이에서 야경을 보고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와이탄의 불빛은 헝가리 국회의사당과 버금갈 만큼 아름다웠지만, 동방명주의 화려한 조명은 인공적인 느낌이 강해 감흥이 없었다. 그때 나는 ‘역시 나는 대도시와는 잘 맞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눈물날 만큼 아름다웠던 시드니 야경

하지만 페리 위에서 마주한 시드니의 야경은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웠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건물들, 오페라 하우스를 감싸는 따스한 불빛, 하버 브리지를 건너는 자동차와 버스의 헤드라이트까지… 나는 눈을 감고 빌었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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