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마운틴 투어에서의 추억
시드니 여행을 준비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하버 브리지와 오페라 하우스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명소가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관광 정보를 찾아보다가 블루 마운틴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이곳은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곳으로 한국에서는 블랙핑크 제니가 링컨스 락 절벽에서 찍은 사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시드니에서 차로 약 2시간 거리에 있지만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다소 불편해 나는 마이리얼트립일일 투어를 통해 다녀오기로 했다.
사실 투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가장 유명한 장소만 빠르게 둘러보느라 늘 시간에 쫓기고, 가이드가정해준 식당에서 밥을 먹어야 한다는 점도 답답하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여행의 매력인 우연한 순간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소규모 투어라 혼자 온 사람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다고 해서 한 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13시까지 집결지에 도착하니 이미 커다란 벤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블루 마운틴으로 향하는 동안 가이드님은 쉬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블루 마운틴의 역사와 배경을 유머리스하고 지루하지 않게 설명해 주셔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을 수 있었다. 링컨스 락에 도착하자 가이드님은 절벽 끝에 앉아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나는 다리가 덜덜 떨려 결국 앉은 채로 천천히 움직였다.
절벽 끝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발끝 아래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협곡이 펼쳐져 있었고, 금방이라도 바람에 휩쓸려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문득 “내가 이곳에 또 언제 와 보겠어” 생각이 들자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다. 가이드가 지목해 주는 포즈를 빠르게 취한 뒤 나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 앉은자리에서 조심스레 일어났다.
사진을 찍고 주변을 살펴보니 투어 인원 10명 중 6명이 혼자였는데 나만 빼고 모두 여성분들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뒤쪽에 있었는데 옆에 있던 도균이 형과 민후 형이 “괜찮으면 우리와 같이 다니자”라고 말을 건넸다. 두 분은 같은 대학의 선후배로, 졸업 후 연차를 쓰고 함께 시드니 여행을 왔다고 했다. 내가 전역하고 혼자여행 중이라고 하니 형들은 축하한다며 “오늘은 네가 주인공이야”라며 사진을 많이 찍어 주셨다.
잠시 들른 로라 마을에서 형들이 아이스크림 안 먹냐고 물었다. 나는 “비싸지만 않으면 먹고 싶다”라고 했고, 형들은 웃으면서 “그냥 우리가 사줄게”라고 말했다. 우리는 아이스크림 가게 앞 밴치에 앉아 젤라또를 먹으며 지금까지 다녀온 나라들과 앞으로 여행할 곳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자연스레 군대 이야기도 꺼냈지만, 아쉽게도 형들은 카투사 출신이라 육군인 나와는 공감대가 맞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돼서 다 같이 태국 음식점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가이드가 이 식당은 양이 많으니까 여러 메뉴 시켜서 나눠 먹고 더치페이하는 건 어떠냐고 했는데 괜히 복잡할 것 같아서 그냥 따로 시키기로 했다. 나는 태국 음식 중에 가장 익숙한 팟타이를 주문했다. 팟타이가 유명한 건 알고 있었지만 기회가 없어 먹어보지는 못했다.
동그란 접시 위에 윤기 나는 쌀국수가 볶아져 나왔고, 그 사이사이로 닭고기 조각과 익힌 달걀, 아삭한 숙주, 잘게 부순 땅콩가루, 라임 조각이 올려져 있었다. 첫 입을 먹어보니 달콤하고 짭조름한 소스가 면에 잘 스며 있었고, 닭고기는 부드럽게 씹혔다. 땅콩의 고소한 풍미가 더해져 젓가락을 놓을 수 없을 만큼 중독적인 맛이었다. 일행들에게 “오늘 팟타이 처음 먹어 보는데 이렇게 맛있을 줄 몰랐어요”라 하니 모두 어떻게 이제야 처음 먹어보냐며 놀라워했다.
식사를 마친 뒤 다시 차에 올라 세 자매 봉으로 향했다. 세 자매 봉은 절벽 가장자리에서 세 개의 뾰족한 바위 봉우리가 나란히 솟아 있는 모습으로, 이름처럼 세 자매가 서 있는 형상을 닮아 그렇게 불린다고 한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는 중 한 중년 여성 분께서 나에게 나이를 물으셨다. 스물두 살이라고 하자 자신의 아들과 동갑이라며, 혼자 여행하는 걸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으시냐고 물으셨다. 나는 처음에는 많이 걱정을 하셨지만 행복해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드리니 이제는 안심하신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분은 젊은 나이에 이렇게 자유롭게 여행하는 모습이 부럽다고 하셨다.
아주머니는 혼자 여행 중이라고 하셨다. 자녀분이 나와 동갑이라면 우리 엄마와도 비슷한 또래이실 것이다. 그런 나이에 혼자 여행을 떠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익숙하지 않은 앱을 사용해야 하고, 낯선 도시에서 길을 찾아야 하고, 돈이 떨어지면 ATM에서 현금을 인출해야 한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번역기에 의지해야 할 때도 많을 것이다.
대학생 때 스스로 번 돈으로 여행을 다니며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어린 나이에 떠나지 못한 걸 후회한다 “며 세상이 넓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에게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많이 떠나보라고 조언해 주었다. 하지만 정작 여행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여행이 뭐 그리 대단하냐, 위험하지 않냐 “는 걱정 섞인 말로 두려움을 심어주곤 했다. “경험해 보지 않은 자의 조언이 가장 위험하다”는 말처럼, 만약 그런 반응에 겁을 먹고 여행을 포기했다면 아마 평생 후회했을 것이다.
어느새 이번 투어의 하이라이트인 별빛 투어 시간이 다가왔다. 해가 지면서 밖은 점점 어두워졌고, 가이드는 자신만 아는 별이 잘 보이는 장소가 있다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했다. 차에서 내려 포인트로 향하는 길을 꽤 험했는데, 왜 이곳이 유명하지 않은지 바로 알 수 있았다. 전망대에 도착하자 하늘 가득 수많은 별들이 쏟아지듯 빛나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에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태어나 이렇게 많은 별을 본 건 처음이었다. 신호조차 잡히지 않는 이곳에서 우리는 손전등 불빛을 하늘로 비춘 채 사진을 찍었고, 주변이 어두워 카메라를 3초 노출의 야간 모드로 설정했다.
집결지로 돌아가는 길, 투어를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7만 원이라는 가격이 부담스러워 잠시 망설였지만, 막상 해보니 대중교통으로 가기 힘든 곳을 편하게 다녀올 수 있었고, 사진을 정성껏 찍어주시는 가이드와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참 즐거웠다. 차 안을 둘러보니 힘든 일정 탓인지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