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가 아마 국민학교 3학년 나이로는 9~10세쯤 되었을 때다 남영동 지질광물 연구소 사택에 살 때이다. 그날은 미술시간이 있다 하여 도화지와 크레파스를 지참하라는 선생님의 지시가 하루 전에 있었다. 그래서 분주하게 아침부터 책가방을 싸는데 도화지는 준비되었는데 크레파스가 형과 누나가 쓰던 지저분하고 몽땅한 크레용 밖에 없어 엄마한테 크레파스를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사실 그전부터 학교 앞 문방구 옆을 지나칠 때면 맑게 비치는 플라스틱 가방에 들어있는 24색 48색 큰 것은 56색까지 있는 크레파스가 갖고 싶었다.
지난번 미술시간에 내 짝이 48색 크레파스를 가져와 뚜껑을 여는데 색색이 정리된 크레파스가 너무도 아름답고 부러웠었다. 그리고 크레용은 양초처럼 종이 위를 미끄러지는 느낌으로 도색이 쉽지 않아 여러 번 문질러야 하지만 크레파스는 부드러워서 쉽게 진하게 칠 할 수 있어 편하고 좋았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날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48색 크레파스를 쟁취하리라 마음먹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색깔이 모자라서 그릴 수 없다고 하니 엄마가 하나하나 정리를 해서 주며 만약 모자라는 색은 네 짝에게 빌려 쓰라며 달랜다. 첫째 나는 정리되지 않고 조그마한 신발주머니에 담아 있는 것부터 싫었다. 난 그때부터 울며 사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던 사택골목은 세 세대가 사는 일본식 주택으로 일자형으로 마당 겸 길로 나란히 선 형태로 지어져 있는데 우리 집은 맨 끝 쪽으로 이층 집이었다.
나는 그 골목, 그 사택에서 좀 유명했다. 동선이가 한 번 울기 시작하면 끝없이 칭얼대 옆집 아주머니들도 ” 또 동선이가 시작했네 " 라면서 말이다.
엄마는 이제 학교 등교시간 늦는다며 나를 문밖으로 밀쳐내며 학교 가기를 종용했다. 하지만 나 역시 만만치 않았다. 문밖으로 쫓겨난 나는 마당에 주저앉아 울며 시위를 계속했다. 그러기를 사택 대문을 지나 꺾인 골목을 지나 큰길에 다다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제 거의 한 시간의 실랑이로 나의 울음소리는 사라지고 멀리 좁은 골목 저 편에 서서 엄마와의 기싸움에 들어갔는데 낌새를 보니 엄마는 실제로 돈이 없는 상태라는 것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학교 등교시간은 지났고 더 이상 희망이 안보였다. 이제 더 이상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할 수 없이 마른 눈물을 훔치며 학교로 향했다.
아직도 뚜렷한 얼굴 형태를 기억할 수는 없지만 우리 담임선생은 아주 미인이었다. 생각나는 얼굴 특징은 입이 조금 앞으로 나왔다랄까 가느다랗고 여린 얼굴에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 자 모두들 미술용품을 꺼내서 그림을 그리는데 모두들 준비해 왔죠? "
제목은 생각이 안 나는데 가져온 크레용과 크레파스를 꺼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무슨 일을 시작하면 골돌 하게 빠지는 편이다. 특히 그림을 그릴 때면 혀를 내밀며 초집중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 행동을 보며 놀리기 도 한다.
언제 내가 크레파스 때문에 울고 불고 했냐는 듯 신발주머니 안에서 색깔을 골라가며 나는 그림 그리기에 몰두해 그림을 그렸다. 내 짝은 그날도 48색 크레파스를 가져와 보라는 듯이 펼쳐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실 그 학년 그 수준에 필요한 색깔은 그리 많이 필요치 않다. 갖고 있는 크레용은 몽땅하고 지저분 하지만 필요한 색깔은 어느 정도 다 구비 돼있어 굳이 빌려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 시간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선생님이 " 모두들 다 그렸어요? 무슨 질문 있어요? " 하는데 옆에 앉았던 짝이 손을 들며 " 선생님 동선이 가요 더럽고 지저분한 크레용으로 그림을 잘 그렸어요"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급작스러운 칭찬에 머쓱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다가와 나의 그림을 보며 " 와우 정말 잘 그렸네 " 칭찬을 하며 모두에게 내 그림을 보여주며 교실 뒷벽 게시판에 내 그림을 붙이는 게 아닌가
내 기억으로는 그전까지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 재질이 있다는 칭찬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기야 요즈음처럼 집에서 그림을 그릴 기회조차 없었던 시절이었으니 누구에게도 나의 재질을 평가받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정말로 너무너무 기분이 좋았다. 특별히 선생님이 나를 인정해 주는 것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내 그림은 오랫동안 게시판에 붙어 있었다.
내 인생의 변곡점을 말하라 하면 바로 이 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미술시간이 제일 기다려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 후로 중학교에 오르자마자 미술반에 들어갔고 미술대학에 들어가 나의 직업이 미술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림을 그림이 일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다음 학년으로 진급했는데도 계속 같은 담임 선생님이 우리 반을 맡으셨다. 하루는 선생님이 나를 부르더니 다음 주말에 서울신문사 주최로 어린이 사생실기대회가 열리는데 나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래서 학교가 끝나는 대로 집으로 달려가 엄마한테 허락도 받고 엄마와 함께 학교 앞 문방구에 가서 그 내가 갖고 싶어 하던 48색 크레파스를 샀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생대회는 창경원에서 열렸는데 엄마와 같이 가서 김밥 먹으며 소풍온 기분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다행히도 그때 입선을 해 상장을 받아 아직 어디엔가에 보관되고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 앞으로 나아가는가? 무슨 일을 시작할 때 작으나마 동기가 주어져야 그 일을 시작하고 진행할 수 있다. 이 일을 한다면 누구가 좋아하겠다든가, 그 일로 인해 누군가가 나를 기억하고, 나의 존재감을 나타낼 수 있다든지 하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그 일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격려, 그냥 지나치지 않는 관심, 별거 아닌듯한 조그마한 것도 인정해 주면 우리를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불씨가 될 수도 있다.
나를 인정해 주고 나를 칭찬해 준 그 선생님 덕분에 지금까지 그림을 그리려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