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침한 여관방에 담긴 인간의 자화상
<복수는 나의 것>은 실제 존재 했던 연쇄살인 사건을 토대로 제작된 하드보일드 영화이다. 도쿄 올림픽을 1년 앞두기 전 여자와 노인을 포함해 5명을 살해하고 78일간 도주한 인물인 <니시구치 아키라>는 극 중 주연으로 등장하는 에노키즈 이와오의 모티브가 되었고, 이마무라 쇼헤이는 이 사건을 추가적으로 취재했다고 한다. 소설은 그 당시에 일본사회의 단면을 가감없이 드러나는 문법으로 호평을 얻었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의 특징이 그렇듯이 인간의 생태계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그의 화법이 이 영화에서도 빛을 발한다. 특히 인간에겐 '선'이 있는가에 대한 거대한 물음이 물음표로 머물고 있는데, 이는 그의 작가주의적 면모를 부각시킨다. 부표되어 일본사회를 떠돌고 있는 '범죄'라는 사건의 뒷면에는 결국에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회귀하게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인간은 '모호함' '알수 없음' 그 자체라는 것이다. 모호함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잠재되어 있는 욕망은 프로이트적 무의식에 기생하고, 의식적으로 개인이 파악할 수 없는 비매개적 대상으로 정의 되어지는 어떤 불확실성에 있다. 실존주의적이면서 구조주의적인 그 중간 지점에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는 위치한다. 흡사 이러한 방식은 김기영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영화에는 윤리가 없다. 윤리는 '보편성' 일반성' '도덕성' 등으로 치환되는 개념어고, 인간의 궤적을 정의할 수 있는 방향성이다.
<복수는 나의 것>은 이러한 윤리가 없을뿐더러 혼재되어 있는 대비들이 인간을 거울처럼 비춘다. 마치 <붉은 살의>에서 사다코가 강간을 당할 때 거울처럼 맨들 맨들한 다리미에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는 것과, <나라야마 부시코>에서 인간과 동물들의 지속적인 대비들은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적 동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론 그러한 대비는 동일성을 확보하며 나아가게 된다는 점이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복수의 나의 것은> 두 그룹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한 그룹은 그가 태어나고 성장했던 '가족'들이고, 또 한 그룹은 살인을 저지르고 도주중에 거주하게 된 여관에서 마주친 사람들이다. 신비한 점은 이 두 그룹의 이야기들이 '여관'이라는 공간에서 펼쳐진다는 것에 있다. 여관이란 장소는 '쉼'을 제공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은밀하게 은폐되어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가족들이 운영하는 여관과 하루가 운영하는 여관의 차이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인간의 욕망이 동시에 투영된 이마무라 쇼헤이의 블랙 유머의 장이다. 하루가 운영하는 여관에는 여자를 부를수 있는 욕망을 해소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개방되어 있지만, 하느님을 믿는 열렬한 카톨릭 신자인 아버지의 집안에선 그러한 욕망은 억제되어 있는 상태로 보인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이 두 그룹을 다르게 묘사하지 않는다. 아버지인 시즈오는 이와오가 사기죄로 감옥에 들어간 후에 그의 아내인 가즈코의 외로움을 채워주고자 다른 남자에게 강간을 지시하기도 하며, 가즈코를 문 강아지를 뜨거운 물을 뿌려 하는 잔혹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심지어 이와오의 아내인 가즈코는 시즈오를 흠모하면서 서로 언제 아내가 병들어 죽을까를 고대하는 장면을 통해 '가족'이란 공간이 어떻게 해체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설의 장으로 관조한다. 이러한 '여관'과 '종교' '가족' 이마무라 쇼헤이가 극혐했던 '군국주의'가 드러나는 장면들은 어떻게 일본사회에서 이와오와 같은 괴물이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는지를 간접적으로 조명한다. 특별히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면 후반부에 이와오가 진실로 사랑하는 것처럼 묘사했던 하루를 목졸라 살해하는 장면이다. 이를 취조현장에서 원인을 묻는 형사에게 자기도 왜 죽었는지 이해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 바로 그것이 모호한 인간 그 자체라는 사실을 규명하면서 이 영화는 그 자체로 관습에서 탈피하여 도주한다.
사형을 치루기 전에 마지막 면회현장에서 '종교', 즉 '신'을 들먹거리면서 자신의 아들에게 '파문'을 선언하는 아버지의 열렬한 종교심은 아들에게 직접 사형선고를 내리는 판사처럼 군림한다. 아들은 그를 끝까지 부정한다. 종교도 혈연도 결국에 그를 죽음으로 몰아 넣는 것에 일조했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결코 깨닫지 못한채 5년후에 그의 유골을 들고 케이블 카를 타고 가즈코와 함께 산으로 올라간다. 이 장면에서 논란이 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유골을 던지는 장면에서 연출되는 프리즈 프레임이 바로 그것이다. 유골은 땅에 떨어지지 않고 하늘이란 공간에 멈춰있다. 중력을 거스르는 이 현상은 죽어서도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아들의 집착을 묘사할 수도 있고, 죽음에도 불구하고 벗어날 수 없는 욕망을 상징하는 현상처럼 보인다. 리얼리즘으로 극화 된 세계로 설정 된 <복수의 나의 것>에서 등장하는 이러한 초현실주의는 끝까지 천국을 향해 가고자 하는 인간의 허무함 또한 극화한다. 마지막 가즈코와 시즈오가 뼈를 던지며 스크린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장면은 우리의 표정과도 닮아 있다. 영화를 보며 시종일관 인간의 음침한 곳을 관망하고 있는 하루의 어머니 히사노가 삶을 위해 응시했던 그 눈빛을 우린 기억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에겐 '본질'적인 요소보다 '실존'적인 요소가 가하며, 이러한 실존은 인간군상의 은폐할 수 없는 구조적 현실에 처한 이름 모를 괴상한 관계들이 뒤섞여 만들어지는 기이한 세상이라는 사실을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일본사회를 여과하여 표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는 상처를 봉합하는 영화가 아니라 드러내는 영화라는 김기영의 말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