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하민 Jul 25. 2024

인류의 재앙, 이데올로기

서양현대사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데올로기로의 고찰. 저자의 주관적 견해. 

일러두기

이 글은 작가가 책 <세계화시대의 서양현대사>을 읽고 주관적인 생각을 가득 담아 작성한 글임을 밝힙니다. 

글에 대한 비판과 문제제기, 토론은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아주 오랫동안 종교의 막강한 영향을 받아왔다. 2000년 전 스스로를 메시아라 칭하며 전인류를 상대로 한 전지구적 구원을 선포하였던 나무에 달려 죽은 한 사람의 영향으로부터 뿌리를 내려 오늘날의 사회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17세기 전까지만 해도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이후 인류의 큼지막한 역사들은 모두 종교라는 대전제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비로소 이성적인 동물이 되었다. 17세기 계몽주의 철학의 유행으로 인간은 점점 종교를 부인하고 인간의 위대함을 입증해 내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과학의 발전과 자본주의의 발생이 생겨났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이 낳은 가장 큰 괴물은 기계도, 핵무기도 아닌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의 발생은 인간을 큰 재앙 속에 던져놓았다. 종교가 진리의 기준이 되었던 전과는 달리 인간의 이성이 진리의 기준이 되어버린 상황에서는 반드시 갈등과 대립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는 신에 대한 믿음이 중심이었던 종교와는 달리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비롯된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이성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과 더 나아가서 내 이념이 곧 진리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17세기 이전 역사 속에 많은 아픔이 수반되었던 사건들에는 종교의 탈을 쓴 인간의 관념이 큰 비극을 초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인간의 이성은 그 본질로서 악을 수반시킨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는 왜 그렇게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였으며, 소련의 스탈린은 왜 숫자로밖에 나타낼 수 없는 사람의 수를 죽였을까? 나치의 사례를 들어본다면, 나치의 유대인학살은 반유대주의와 우생학을 통한 자민족우월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자신들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많은 유대인들을 죽여야만 했던 것이다. 당시 엄청나게 많은 수의 유대인을 죽이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학살을 자행했던 나치는 나치즘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자체로서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띤다. 그러므로 나치의 유대인 제노사이드 이른바 홀로코스트는 이데올로기적 산물인 것이다. 당시 독일인들은 어땠을까? 이웃으로 지내던 평범한 유대인이 어느 날 끌려가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아야 했던 독일인들은 어떤 심경이었을까? 나치에 저항한 독일인들은 사형에 당하였다. 하지만 나치에 저항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으며, 나치에 대해 주목할만한 점은 대중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다. 이데올로기는 그 이데올로기를 믿는 사람들 또한 마비시킨다. 나치즘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매료된 독일인들은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상황을 당연한 듯 여겼다. 심지어는 숨어있는 유대인들을 경찰에 넘기기도 했다. 직접 살인에 가담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독일인들은 모두 사이코패스였을까? 아니다. 그들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들로 하여금 이성을 마비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이성의 산물, 이데올로기였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데올로기는 인간을 현혹한다. 마치 우리에게 내일의 태양이 더 밝게 비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듯 보인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더욱 잘 살기 위해 존재하지만 우리를 더욱 아프게 한다. 히틀러가 결국 자살하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한반도에는 미국과 소련의 영향으로 분단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피부로 겪고 있는 아픔이다. 이데올로기가 낳은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전 지구적인 냉전기를 거치며 우리나라는 특별히 분단과 한국전쟁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한민족이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전쟁까지 일으키며 분단되었던 건 까닭인가? 두말할 것도 없다. 냉전기의 산물이었던 한국전쟁의 원인은 100% 이데올로기적 대립이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대립하며 그 누구도 서로 양보하지 못하였다. 서두에 언급했듯 인간은 자신의 이데올로기가 진리라는 것을 입증하려 한다. 그 결과가 전쟁이었고, 어쩌면 우리에겐 긍정적일 수 있는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발전이었다. 하지만 그 반대로 북한의 공산주의를 중심으로 한 주체사상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우리 민족의 뼈아픈 역사를 남겼는가? 

나는 질문하고 싶다. 인간의 이성은 완벽한가? 인간의 이성은 정말 이상을 실현시킬 도구로서 작용할 수 있는가? 이를 위한 수많은 시도가 지난 150년의 역사동안에 일어났다. 하지만 그 시도들에는 너무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의 피와 아픔이 동반되었다. 그렇다면 많은 양의 희생을 요구했던 그 시도는 성공적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비록 공산주의는 소련의 붕괴로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았지만, 그 반대에 있던 자본주의가 온전한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여러 자본주의의 모순과 합의되지 않는 타협점으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칼을 빼들고 있다.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서민들끼리도 이데올로기적 대립으로 갈라 치기가 이루어져 있다. 20세기에는 지역갈등이 대표적인 갈등으로 있었다면, 21세기에는 세대 간 갈등 더 나아가 성별 간 갈등도 더욱 심화되어가고 있다. 모든 갈등은 인간의 관념 즉 이데올로기로부터 시작된다. 이 갈등들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로 또 다른 이데올로기가 제시될 것이다. 이와 같은 구조로 우리 사회는 점점 이데올로기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데올로기가 나쁘다 그러니까 이데올로기 같은 건 다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그런 오해가 없길 바란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에 이것이다. 인간의 관념으로부터 비롯한 모든 것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이고 그것은 이미 실증되었다는 것이다. 계몽주의 철학은 틀렸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 나는 크리스천이고 유신론자이며 그리스도교의 유일신을 믿는 사람이지만, 이 글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변증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단순히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해 언급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17세기 이전 종교가 성행했던 시기에는 과연 그런 아픔이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종교가 만들어낸 비극 중 마녀사냥과 십자군 전쟁등은 앞서 언급했던 종교의 탈을 쓴 인간의 관념으로부터 비롯된 비극이었다.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한 교회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본질을 잃어갔는데, 그 본질을 잃어가는 과정에는 인간의 이성이 있었다.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를 회복하기 위해 인간은 또다시 그 해결책인 또 다른 이데올로기를 제시하였는데 그게 바로 종교개혁이다. 이렇듯 인류의 역사는 이성의 불완전성으로 종속되어 왔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인간의 이성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함으로 자신들의 이성의 불완전성을 역설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로 서양철학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그가 남긴 여러 말 중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것은 바로 ‘너 자신을 알라'일 것이다. 대개는 소크라테스가 어떠한 사유에서 이런 말을 남겼는지 모르며 때로는 해학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소크라테스가 이 말을 하며 주장했던 것은 ‘너의 무지를 알라’라는 것이었다. 시대를 관통하는 명언이다. 가히 그렇다. 오늘날의 인류는 이성을 통한 이상의 실현을 위해 끊임없이 팔을 걷어붙이며 시도하려 나선다. 과연 인간의 이성은 온전한가? 우리가 온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로 그 자체로서 온전한 것인가? 인간의 관념은 그 관념으로서 온전할 수 있을까?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할 것이다. 이데올로기라는 인간의 관념에 불과한 것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필히 질문해야 할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