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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자따봉 Oct 08. 2023

D+11 [긴급상황] 모두 화장실로 대피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일기도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루 종일 정신없던 날을 보낸 터라, 누워도 잠에 쉽게 들지는 못했다. 일찍 자는 것은 포기한 채로 핸드폰을 하다가 잠에 들었나,  그때 부엌에서 접시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취를 하다 보면 집 안에서 나는 소리에 청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을 때, ‘귀신인가?‘라는 생각을 한다면 당신은 초보 자취생이다. 자취를 6년 하게 되면, 집에서 소리가 들리면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설마 바퀴…?' 그렇다, 자취생에게는 바퀴벌레가 귀신보다 무섭다.


그러나 방금 들은 소리는 바퀴벌레의 소행이라고 하기에는 스케일이 컸다. ’설마 송이…?' 내가 있을 때에는 자의로 옷방 밖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거실방까지 나오더라도, 내가 집을 외출했을 때 몰래 거실방으로 나와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부엌을 올라갔다고?



부엌으로 나가 불을 켜니 주황색 털 뭉치가 가스레인지 위에 있었다. 세상에, 송이가 친 사고가 맞았다. 빨래가 걸려있는 건조대를 계단처럼 타고 부엌까지 오른 모양이었다.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일이겠지만, 아직 90% 일반인인 사람으로서 놀라 기절할 것 같았다. 대체 왜 부엌을 올라가는지부터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명심하자, 송이는 고양이다. 낮에 집에서 대패삼겹살을 구워 먹었는데, 그 냄새에 이끌려 구경을 나온 모양이었다.


송이는 부엌의 불을 켜자마자 놀라서 도망갔다. 하지만 부엌에 어떤 것들이 널브러져 있는지 보고 나서, 나도 못지않게 놀랐다. 예전에 구조자분이 집에 왔을 때 혹시 모르니 부엌의 위험한 것들은 치워놓으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바로 식칼이나 조리도구 등 위험한 물건들은 모두 선반 안으로 넣어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밥을 먹고 하지 않은 설거짓거리들과 널려있는 세재 용품들을 보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혹시나 핥아먹기라도 했다면, 이라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일단 송이를 발견한 곳이 가스레인지고, 고기 냄새에 이끌려 부엌으로 간 것일 테니 최악의 상황은 염두에 두지 않기로 했다. 집사는 설거지를 제때제때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으며, 송이의 부엌 탐방은 끝이 났다.




송이의 콧물이 날이 갈수록 심각해져, 구조자님과 의논하여 송이에게 감기약을 먹이기로 했다. 이전에는 콧물이 조금 있는 정도였다면, 하루 사이에 콧물이 고드름처럼 자라 있었다. 콧물이랑 침이 섞여 입 근처에 대롱대롱 달려있는 모습이 오늘 길에서 주워왔다고 해도 믿을 법한 모습이었다.


송이가 입원했었던 동물 병원에 전화를 걸어, 송이의 현재 상태를 병원 원장님께 전달드렸다. 노란 콧물을 흘리고 있으며, 입가에 침도 흘리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사람과 달리 고양이는 전화만으로도 진찰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이 전에는 병원에서는 약을 과복용하게 되면 간이 안 좋아질 수 있어 상황을 지켜보자고 하셨었는데, 현재 송이의 상태가 심하다 보니 항생제를 조금 먹여보기로 했다.


약만 받아와도 되는데, 송이가 콧물을 너무 심하게 흘리고 있어 구조자 아저씨께서 집에 들러 콧물 좀 닦아주고 가시겠다고 하셨다. (송이의 구조자는 2분인데 편의 상 구조자님과 구조자 아저씨로 구분하도록 하겠다.) ‘쉽지 않을 텐데...’라고 생각했지만, 나보다 구조자 아저씨께서 고양이에 더 익숙하실 테니 믿고 부탁드렸다.


과연 애를 붙잡을 수가 있을지 걱정하는 나와 달리, 구조자 아저씨는 사람이 둘이니 수건 한 장만 있으면 된다고 하셨다. 안타깝게도 수건 1장의 결과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다. 구조자 아저씨분의 여유에 비해 송이는 묘생을 걸고 뛰어다녔기에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송이는 처음 숨숨집에서 뛰쳐나오자마자 문을 노리더니, 문을 열어 탈출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판단이 서자 문고리를 눌러 문을 열고자 튀어 올랐다. 실패해서 망정이지, 송이가 성공했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아찔했다. 대체 문을 여는 방법은 또 언제 깨달았나 생각이 들었을 때, 송이는 이미 방을 3바퀴 정도 돈 상태였다. 송이가 뛰어다니는 모습만 보면 우리가 본인 콧물 닦아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멱을 따려 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위아래로 튀어 오르면서 방을 뛰어다니는 데, 대체 길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애가 이렇게까지 피지컬이 좋은 고양이가 되었는지 신기했다.


구조자 아저씨가 수건으로 송이를 몰아가는 모습을 보고 바로 결과를 예상했기에, 와중에 나는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아저씨와 관계가 없는 사람인 척했다. 아저씨에게는 미안하지만, 나중에 송이에게 미움을 사더라도 송이가 아저씨만 미워할 수 있도록 손절했다. 야생성을 온전히 드러낸 고양이의 모습은 태어나서 처음 봐서, 혹시나 송이가 저 상태로 나한테 달려들까 봐 무서워 이불로 온몸을 감쌌다. 송이를 위해서 집까지 와준 아저씨에게는 미안하지만, 유혈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2명이 다치는 것보다 한 명만 고생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결국 송이와 아저씨는 옷장의 구석에서 대치하다, 아저씨의 포기 선언으로 끝이 났다. 어찌나 열심히 날아다녔는지, 대롱대롱 달려있던 송이의 콧물은 사라져 있었다. 원래 목표였던 콧물 닦아주기만 생각한다면, 어찌 보면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송이의 상황은 그리 괜찮지 않았다. 더 이상 숨숨집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는지, 송이는 모래 화장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양이들은 극단의 공포를 느끼면 화장실로 숨는다던데, 드디어 송이의 머릿속에 화장실이라는 개념이 잡혀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떻게든 긍정적인 면을 생각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오줌으로 만들어진 돌덩어리와 화장실 모래에 뒤섞인 채 숨어있는 송이의 모습은 그리 긍정적이진 않았다.



처음에는 송이가 몇 시간 뒤면 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숨숨집으로 들어갈 줄 알았다. 구조자 아저씨를 과감하게 손절 치며 내버린 양심이 무의미하게도, 송이는 나 또한 그리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중간에 몇 번 송이가 잘 있나 보러 갈 때마다, 송이는 배신감에 사무치는 표정으로 화장실에서 나를 째려보았다.


심지어 처음에는 나를 보더니 냅다 하악질을 하길래 송이에게 일단 미안하다는 말부터 던졌다. 송이 앞에 조용히 쪼그리고 앉아서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송이가 나한테 잘못했다고 해야 할 입장이었는데, 하루 만에 뒤바뀐 신세가 억울했다. 하지만 내가 억울한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당장 우리 집 상전이신 고양이가 극대 노하셨기에, 일단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버려두고 사죄드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도 효과가 있었는지, 그다음에 마주할 때에는 하악질은 하지 않고 모래 화장실에서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후에도 송이가 숨숨집으로 안녕히 가셨는지 간간이 확인했는데, 송이는 모래 대피소에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송이의 화가 언제 풀릴지는 모르겠지만, 사죄하는 마음으로 참치를 방에 놓고 나왔다. 참치에 감기약을 탔기 때문에 더 노하실 수도 있지만, 일단 맛난 참치를 드시고 기분이 조금 풀리시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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