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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자따봉 Oct 08. 2023

D+12 알고 보니 나의 고양이는 상위 1%의 효자였다

야행성 동물인 고양이의 습성에 맞춰 이 글도 자정을 갓 넘긴 새벽에서부터 시작된다. 전날 구조자 아저씨를 만나 목숨을 건 사투를 펼친 송이는 자정이 되도록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모래 화장실에 숨어 한 발짝도 나오지 않은 채, 간간히 자신을 들여다보는 나에게 하악질만 날렸다. 오죽 무서웠으면 저럴까 싶어 안쓰러우면서도, 말 그대로 똥모래밭에서 굴러다니는 송이를 볼 때마다 마음이 착잡했다.


화장실에서 최후의 도피를 하고 있는 송이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도 송이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쓰디쓴 감기약을 먹는 것이다. 송이가 제일 좋아하는 참치에 감기약을 타고 물을 섞어서, 약이 있다는 사실을 구분할 수 없도록 교묘히 숨겼다. 물론 송이가 한 입 먹는 순간 들통날 속임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어제 수건을 휘날리며 자신을 잡으러 다니던 구조자 아저씨보다는 나를 덜 싫어하겠지 싶었다.


원래 송이의 식사루틴은 특이한데, 저녁에 밥을 놔주면 자정이 되어서야 먹는다. 자정에 빈 그릇을 사료로 다시 채워주면 다음날 새벽 사이에 또 말끔히 비워놓는다. 그런데 오늘은 자정이 넘어서도 모래 화장실에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정이니만큼 포기하고 잘까 싶었지만, 하루종일 똥밭에 숨어 쫄쫄 굶은 송이를 생각하니 안쓰러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새벽 1시쯤 송이 방에 가보았다. 설마 아직까지도 화장실에 있나 싶었는데, 다행히 원래 자신의 은신처인 숨숨집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몇 시간 동안 치우지 못한 감자와 똥덩어리들이 무척 신경 쓰였는데, 드디어 치워줄 수 있게 되었다. 송이는 그 안에 있으면서 코가 괜찮았나 싶을 정도로 냄새가 고약했다. 거기에 열심히 치울수록 모래 먼지가 날리기 시작하니 숨이 막혔다. 고양이 똥냄새와 섞인 먼지 가운데에 머리를 집어넣고 숨을 쉬어야만 하는 내 심정을 송이가 알기나 할까.


고양이적으로 너무하다 싶어 서러워질 때쯤, 송이의 밥그릇이 보였다. 세상에, 밥을 비우다 못해 아예 그릇을 설거지한 모양새였다. 비록 송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참치이지만, 항생제 가루가 섞여있어 무척이나 썼을 텐데 씩씩하게 다 먹어준 것이 기특했다. 그래, 내 마음 몰라주고 하루종일 똥밭에 가 있어도 약만 씩씩하게 잘 먹어주면 그게 최고의 효자 고양이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송이가 밥을 잘 먹었는지부터 확인했다. 만약에 송이가 약이 입에 맞지 않아 잘 먹지 못한다면, 그때부터 최악의 경우들을 준비해두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본인 콧물 닦아주려고 수건을 든 구조자 아저씨를 망태할아범 취급하는 송이에게 주사기로 약을 먹여야 하게 될 수도 있었다. 저번에는 날아다니는 송이를 본 만으로도 이미 충분했기에, 제발 송이가 약을 잘 먹어주길 바랐다. 기특하게도 송이는 약이 섞은 참치를 남김없이 싹싹 긁어먹었다.  약 잘 먹는 고양이는 진짜 드물다던데, 초보 집사에게 맞춤형으로 태어난 고양이가 바로 송이였다.


이후에 거실에 새로운 숨숨집- 박스 -를 찾은 송이를 위해, 박스 안에 담요를 깔아주고자 생활용품점에 갔다. 처음에는 쓰던 담요를 다시 빨아 쓰려고 했는데, 고양이 오줌 제거법 중 하나로 ‘과감히 버리기’가 있는 것을 보고 포기했다. 어머니 생신 선물로 사 드린 담요를 고양이 오줌에 절인 채 버리게 되었다는 사실이 씁쓸했지만, 정작 엄마는 그리 이 담요를 소중히 여기시지 않았기 때문에 별로 속상해하실 것 같지는 않다. 나중에 엄마가 담요 어디 갔냐고 물어본다면 (그럴 일 없겠지만) 이삿짐 옮기다가 잃어버렸다고 해야겠다. 하여튼, 이래서 사람 자식은 키우면 안 된다. 금이야 옥이야 키워봤자 순 그짓말쟁이로 자라, 떠먹여 준 사랑을 고양이한테 쏟아부을 뿐이다.


생활용품점에서 커다란 수건 두 개를 사서 집으로 왔다. 하나는 (구) 옷상자 (현) 숨숨집 바닥에 깔아주고, 다른 하나는 돌돌 말아 수납장에 넣었다. 혹시나 또 송이가 오줌테러를 해서 버리게 되더라도 미련이 없도록 애초에 2장을 샀다. 정작 사람인 나도 천 원짜리 거친 수건을 쓰는데, 송이의 수건이 내 것보다 좋았다. 사람은 잡초 같이 살아도 고양이만큼은 난방비와 전기세를 바쳐 나약하게 키워야 한다는 말이 나의 이야기가 될 줄이야. 이 와중에도 돈을 더 많이 벌어서 송이에게 더 좋은 가구를 선물할 생각만 하고 있는 걸 보니, 나도 이미 평범한 집사가 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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