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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혜선 Oct 19. 2022

신뢰, "우리가 자발적으로 구속되는 일종의 의존관계"

해외여행, 패키지여행

중국에서 거주하던 때, 하루는 기분전환도 할 겸 남편과 그 지역의 유명한 공연을 보러 가기로 했다. 티켓 정보를 알아보니 할인권을 구매할 방법이 있어서 다른 곳에서 표를 산 후, 공연장을 찾았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는 광고 덕인지 현장에서는 당일 표를 구매할 수 없을 정도로 관람객이 많았다. 그리고 그중의 절반 이상은 우리나라의 단체 관광객이었다.


익숙한 우리말을 들으며 공연장에 들어서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주변을 둘러보다 남편에게 티켓 미리 사서 오길 잘했다. 할인도 받고” 했더니 어디선가 번개같이 남편과 나의 머리 사이로 낯선 얼굴이  나타났다.


 “얼마에 사서 오셨어요?” 


그의 눈빛은 해결하지 못한 미제사건에서 우연히 목격자를 찾은 영화 속 탐정 같았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절대 물러서지 않을 매서운 태세였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단체 관광객으로 보이는 분들이 수십 분 계셨다. 아마도 일행들과 공연비가 비싸다고 생각하던 중 얼떨결에 우리 이야기를 듣게 된 것 같았다. 정황상 근처에 인솔자도 자리하고 있을 것 같고, 이미 공연장에 입장한 상황에서 난처한 분위기를 만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쳤다. 그래도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여기서 살고 있어서 미리 구매하는 조건으로 할인받았지만, 티켓부스에 공지된 금액과 큰 차이가 없어요"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런데도 질문자의 매서운 눈초리는 거둬지지 않았고, 나 역시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부부가 단체 관광객과 달리 할인 표를 구매했지만, 그것은 온전히 티켓만 놓고 보았을 때 이야기다. 우리는 표를 사기 위해 시간과 공을 들였다. 차에 기름을 넣어 1시간을 넘게 운전했으며, 때를 맞추기 위해 근처 식당에서 밥도 사 먹었다. 물론 집으로 돌아갈 때도 같은 공을 들여야 했다. 티켓 구매 대행 서비스, 이동, 안내, 식사 이 모든 것이 단체 관람객의 티켓 가격에 포함된 것이니 어찌 보면 우리보다 그분들이 더 저렴하게 표를 구매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여행 상품 계약 시 받았던 일정표에 기재된 공연비용과 인솔자가 제시한 금액이 달랐다면, 일정표에 공연이 전혀 공지되지 않았었다면, 공연이 ‘선택 관광’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여행 일정과 내용이 형편없었다면 분명 여행사의 잘못이다. 하지만 이미 여행사에서 계약서 형식으로 일정표와 ‘선택 관광’의 항목과 금액을 정확히 제시했다면 그것을 순리대로 따르는 것이 맞다. 누군가에게 등 떠밀려 계약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17세기 프랑스 고전작가인 라 로슈푸코는 그의 책 「잠언과 성찰」에서 신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동진 옮김/ 해누리/ p218~219)


“신뢰는 그것을 받는 사람을 언제나 기쁘게 한다. 그것은 신뢰받는 사람이 지니는 가치에 대해 바치는 찬사, 그의 충직함에 위탁하는 재산, 우리에게 청구할 권리를 그에게 부여하는 서약, 우리가 자발적으로 구속되는 일종의 의존관계”라고 말이다.


‘패키지여행’은 여행 관련 각종 서비스와 정보를 제공하는 여행사 관계자와 그 상품의 가치를 받아들여 대가를 지불하는 여행객들이 함께 완성해야 하는 상품이다. 판매자와 소비자라는 입장은 다르지만 ‘목적지’가 같은 사람들이다. 상품이 소비되는 시점인 출발일 전까지는 소비자가 사용 조건이나 구매 가격을 협의할 수 있지만 계약서를 작성하고 계약이 개시되는 시점부터는 계약 내용을 신뢰하고 따라야 한다. ‘여행 상품’이기는 하나 ‘사람이 하는 일’이 대부분인 일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패키지여행의 첫 번째 관문은 믿을 수 있는 여행사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찾아보려고 노력만 한다면, 기업 혹은 여행사의 공식적인 평가와 개개인에게 물어 들을 수 있는 경험담이 많다. 건전한 회사라면 인솔자, 가이드, 현지 가이드 등에게도 적절한 처우를 할 것이기에 고객을 직접 대면하는 인솔자와 관광객 사이에 신뢰가 깨질만한 사건은 많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 경험으로 돌이켜 보아도 항공권, 숙박, 경비 등을 객관적으로 계산한 정도의 비용을 여행 상품 비용으로 지불한 경우 ‘선택 관광’이나 ‘현지 물품 쇼핑 강요’ 등으로 인솔자와 얼굴을 붉힐 만한 일은 거의 없었다. 더욱이 이전과 달리 요즘은 비행 편, 호텔명, 가이드 비용, 생수 비용, 이동 경로와 시간, 선택 관광 횟수와 비용, 쇼핑 장소와 횟수 등을 일정표에 명시해서 계약서를 작성하므로 믿을 수 있는 회사라고 생각된다면 일정표 역시 믿고 여행을 즐기는 것이 방법일 것이다. 여행기간 동안 여행사 관계자와 여행자는 신뢰를 바탕으로 “자발적으로 구속되는 일종의 의존관계”이기 때문이다.


이해관계가 있는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 혹은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하는 여행이 아니라면 여행은 즐겁고 행복하기 위해서, 좋은 경험을 쌓기 위해서이다. 국내 여행도 계획했던 바가 틀어지면 속상한데, 비행기까지 타고 가서 얼굴을 붉히고 가슴에는 불만족만을 가득 채워 온다고 생각하면 안타깝고 슬프기까지 하다.


요즘도 잊을만하면 한 번씩 저가 여행 상품의 문제점과 잘못된 여행사의 관행 등이 언론에 등장한다. 소비자로서 그런 일을 실제로 겪었거나 가까운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다면 인솔자나 가이드를 쉽게 신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돈이 오가는 일에 문제없기를 바라는 것이 모순인데, 하물며 사람이 단시간에 서로를 파악하고 자는 시간을 빼고는 몇 날 며칠을 얼굴 봐야 하는 일이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비행기는 이미 떴고, 믿을 이는 내 앞의 사람뿐이니 다수가 인정하는 사건이나 안전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면 즐기며 웃는 자가 승자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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